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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cm Feb 02. 2020

<B급 기자 막전막후> 군대

학벌은 군대에서도 따라다녔다. 한 내무반에서 8~10명이 생활했다. 나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대학을 다녔던 것 같다. 초창기 선임들한테 ‘고졸’이라는 이유로 무시받기도 했다.

 

이걸로 상처받지는 않았다.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다만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전역은 1년 6개월이나 남았지만, 조급했다. 뭔가 생산적인 걸 하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책 그리고 글쓰기, 영어 공부밖에 없었다.  


군대에서 철학과 고전을 게걸스럽게 읽었다. 학창 시절부터 윤리와 사상을 좋아했다. 막연히 철학이 모든 학문의 정수라는 환상이 있었다. 대학도 안 나온 보잘것없는 껍데기 속을 지식으로 채우고 싶었다. 내 부족함을 어떻게든 매워야겠다는 절박함이 컸다. 지적 허영심도 있었다. 어디 가서 “나도 이런 책 읽어 봤는데…”라고 말 한마디라도 던져보고 싶었다.


처음 읽었던 철학책은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다. 부대 병영도서관에서 발견한 몇 개 안 되는 철학 서적이었다. 처음에는 읽기 어려웠다. 다음 장을 넘기기가 힘들었다. 집중해서 읽다가 페이지 수를 보면 한숨이 나왔다. ‘아직 절반도 읽지 못하다니.’


그래도 진득하게 완독했다. 읽으면서 아주 흥미로웠다. 지금 내 상황에서 위로가 되는 문장을 여럿 발견했다. 대표적인 문장이 있다. 소크라테스 변명(플라톤-문예출판사) 320쪽에 ‘미래적 현실은 실현되지 않았으나, 자신의 주체적 결단에 의해 선취된 미래가 가능성으로서 깃들여 있다. 이걸 근원적 현실 긍정이라고 부른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동안 현실을 부정했다. 나름 주체적인 결단으로 대학에 안 갔지만, 대학에 가지 못함에 대한 괴로움이 컸다. 하지만 패션 디자인이 나랑 맞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이건 나에게 아주 중요한 진실이다. 성공과 실패를 떠나서 입시 때처럼 헛물을 캐지 않은 게 나에겐 중요하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나름 '근원적 현실 긍정'을 하게 됐다.


책 읽기 초반에는 한 장 한 장 넘기는 게 힘겨웠지만, 어느 순간 내가 책에 침식됐다. 특히나 철학책 읽는 게 너무 재밌었다. 철학을 통해 자연스럽게 나를 해석하고, 분석하는 게 됐다. 당시 이런 행위가 자기객관화의 과정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자기객관화란 자신을 하나의 대상으로 인식해, 타인을 보듯이 나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철학책을 읽으며, 내 감정을 이해했다. 그동안 내가 무엇 때문에 이토록 힘겨워했는지. 무엇이 날 짓누르고 있는지 조금씩 알 수 있었다. 나조차도 몰랐던 나 자신을 알아낼 때마다 신기했다. 마음도 편안해졌다. 마음이 편해지다 보니 조금씩 여유를 찾게 됐다. 이게 바로 철학의 효용성인 것 같다. 철학의 효용성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겠다.


그때부터였다. 활자 중독자 마냥 시도 때도 없이 책을 읽었다. 부대에 검토도 안 받고 수십 권의 책을 밖에서 들여왔다가 크게 문제가 된 적도 있다. 군대에서 도서는 보안 등을 이유로 반드시 부대에 검토를 받고, 도장을 찍어야 반입이 가능하다. 나는 밖에서 사 온 책을 하루라도 빨리 읽고 싶어 부대에 검토도 안 받고, 관물대 밑에 몰래 쌓아놨다. 이 책들은 부대 생활관 검문 때 걸려, 행정보급관한테 불려 가 호되게 혼났다. 이등병, 일병 때는 시도 때도 없이 책을 읽어대 선임들한테 혼도 많이 났다. 군대가 도서관이냐고. 상병-병장 때 쉬는 날 생활관에 거의 없었다. 온종일 병영도서관에 처박혀 책만 봤다.  

글도 많이 썼다. 스스로에게 군생활이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었다. 일기와 독서록을 썼다. 일기에는 그날 하루 일과를 빠짐없이 남겼다. 사람과 부딪히며 느꼈던 감정을 썼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도 매일 적었다. 답은 없었지만, 나의 역사를 남긴다는 마음으로 거르지 않고 매일 일기를 썼다.

2012년 상병 2호봉 때 쓴 일기다.

독서록에는 책을 읽은 후 인상 깊은 문장을 필사했다. 이 문장이 ‘왜 인상 깊었는지’ 이유를 설명하는 주석을 달았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장 폴 사르트르-이학사) 45쪽에 ‘희망 없이 행동해라’라는 문장을 독서록에 썼다. 당시 나는 이런 주석을 달았다.


기대심리다. 이건 사람을 지독하게 힘들게 한다. 노력이든 타인이든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그게 세상의 이치인 듯하다. 기대를 버리자, 대신 좋아하는 걸 하자. 서럽고 억울하지 않게.


영어도 틈틈이 공부했다. 그나마 학창 시절 가장 자신 있었던 게 영어였다. 대학은 안 갔지만, 영어 회화를 잘하고 싶었다. 전역 후 혼자 유럽 여행을 갈 생각이어서, 영어를 놓지 않았다.  상병을 달자마자 전역할 때까지 연등 시간에 영어 공부를 했다.


군생활 1년 10개월은 독서와 글쓰기 그리고 자기객관화의 시간이었다. 군대를 전역할 때까지 75권의 책을 읽었다. 일기장 두 권과 독서록 한 권을 들고 2012년 10월 21일 전역했다.


그해 겨울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혼자 동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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