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경험을 숙성시킨다
모든 행위는 다양한 의미의 층위를 가지고 있다. 차를 마시는 것과 커피를 마시는 것, 둘 모두 카페인 함량이 높은 음료를 마신다는 행위이지만, 각각의 행위가 포함한 사회적, 감정적, 서사적 함의는 매우 다르다. 우리는 차와 커피를 단순히 맛과 각성을 위해 마시는 것이 아니라, 차와 커피가 가지는 맥락과 의미를 소비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과 차를 좋아하는 사람의 개인적 취향이 자주 극명히 차이 난다는 것은 단순한 착각은 아닐 것이다.
나는 커피보다 차를 마시는 것을 더 선호한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커피를 마실 때 보다 차를 마실 때 내 마음에 들어앉은 술렁임이 조금 더 잦아든다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차의 맛 때문이라기보다는, 차를 마시는 환경, 차를 마시게 되는 순간, 그리고 차를 우리고 또 따르는 경험이 어우러져 내게 주는 경험적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문일까, 내가 더 잘 알고 싶은 사람, 더 깊이 대화를 나누고 싶은 사람, 더 위해주고 싶은 사람을 나는 카페보다는 티하우스로 데려간다. 그 환경과 그곳에서의 경험이 나와 그 사람과의 교류를 피상적인 대화에서 벗어나 좀 더 깊은 곳으로 데려간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렇게, 차를 마신다는 행위를 선호하고 또 자주 하려고 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항상 내가 차를 진정으로 잘 마시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더 정확히는, '다도'라는 단어가 있는 만큼 '차'라는 단어와 이를 마신다는 행위에 깊은 역사와 고려가 쌓여 있을 텐데, 내 무지로 인해 이를 경험하지 못하고 단지 흘려보내고 있지 않을까 라는 물음이 마음 한편에 있었다. 차를 마신다는 경험을 더욱 다채롭게 음미할 수 있는 방법을 내가 알고 있다면, 나와 타인 사이의 대화에 차를 마신다는 경험을 곁들여 좀 더 숙성되고 심도 있는 교류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욕망 또한 이 질문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와중, 부인이 나를 위해 금요일 저녁 티 클래스를 예약하였다.
마치 골인 지점에 도달한 마라토너처럼, 한 주간의 일을 마무리하고 신용산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역에서 부인을 만나 부산한 거리를 지나, 조금은 한적한 골목으로 들어가니 '무심헌'이라고 쓰인 어두운 색의 간판이 오른편에서 나를 반겼다.
그 장소에 들어가니 가장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군데군데 걸려있는 반투명한 모직물들이었다. 옅은 색으로 물든 천들은 이 공간을 너무 개방적이지도 않게, 하지만 너무 막혀있지도 않은 신비로운 느낌의 장소로 만들었다
조금 더 걸어 들어가니 오른편에 나무 의자, 책상, 그리고 하얀 천으로 원판처럼 선반 위에 놓여있는 찻잎들이 보였다. 너무 커서 약간은 불편한 의자에 각자 앉으니 섬세하면서도 예민할 것 같은, 하지만 매우 차분한 남성 한분이 우리 맞은편에 앉았다.
그분은 우리가 앞으로 두 종류의 차를 맛볼 것이고, 각 찻잎을 4~5회 정도 반복해 우려 마셔보며 맛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느낄 것이라고 말하셨다. 차에 대한 역사와 산지에 대한 정보를 들으며 그분이 우려주신 차를 한잔 한잔 마시기 시작했다. 매번 찻잎을 다시 우릴 때마다 그분은 우리에게 맛이 어떻게 변하고, 그 맛은 무엇으로 인해 나는지 설명해 주셨다. 독특했던 것은, 단순히 차의 맛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매번 우리에게 차에서 어떤 맛이 나는지 물어보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의 언어와 단어로 맛을 표현하였고, 그 표현을 들은 그분은 이를 좀 더 정제된, 차를 품평할 때 쓰이는 단어와 그 뜻을 알려주셨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나는 그분에게 내가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질문을 했다.
"어떻게 하면 차를 마신다는 경험을 더욱 다채롭게 느낄 수 있나요?"
그분은 곰곰이 생각을 하시더니 다음과 같은 답변을 돌려주었다
"누군가에게 차를 마신다는 것은 철학과 같아요. 다도가 그런 방향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차를 마시기 전에 몸을 정갈히 하는 것, 앉는 것, 우리는 것,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의식이자 의미를 가지는 행위인 것이죠. 반면 제게 차는 맛을 느끼고 품평하는 대상이에요. 그렇기에, 저에게 차를 마신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차를 마시고, 맛을 느끼고, 그렇게 느낀 것을 말로 구체화시키며 서로가 동일한 것을 어떻게 다르게 느끼고 표현하는지 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차를 마신다는 것을 어떻게 다채롭게 느낄 수 있는가에 대한 방법은 다양하고, 그 방법 이전에 차가 나에게 무엇인지 정의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대답은 경험에 대한 색다른 시각을 나에게 선사하였다
우리가 무언가를 경험한다는 것은, 단지 물리적인 감각을 인지하고 그것의 호오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 물리적 자극의 집합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그 자극들을 어떤 식으로 인지하고 싶어 하고, 그리고 이러한 인지를 어떤 방법으로 표현하고자 하는지에 따라 단순한 물리적 자극이 다양한 층위를 가직 경험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이는, 내가 차를 마신다는 행위를 다채롭게 경험하고 싶다면, 차를 마신다는 것이 본질적으로 나에게 어떤 의미이고, 그렇기에 그 본질적인 목적을 채우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경험을 음미하고 또 만들어 나아가면 될지 궁리해야 한다는 말과 동일했다.
나에게 차를 마신다는 것은, 마음의 술렁임을 차분히 한다는 것이고, 좋은 사람들과 깊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맛과 향의 여부를 떠나, 차를 누구와 마실 것이고, 또 어떤 환경에서 마셔야만 내가 즐거울지 생각해보다 보면, 차를 마신다는 행위가 저절로 다채로워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