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몰리션

내 손에 쥐어진

by 창문밖일요일

나는 자기 파괴적인 주인공이 등장하는, 음울한 웃음을 주는 코미디 영화를 좋아한다. 대표적으로 <파이트 클럽>이 있고, 이름값을 200% 하는 <데몰리션>이 그런 영화다. 자기'파괴'까지는 아니지만 누구나 예상 가능한 자신의 평범한 앞날을 거부하고 일탈하는 <졸업>의 벤저민 브래독도 이런 결에서 봤을 때 내가 매력을 느끼는 캐릭터 중 하나이다.


이 주인공들의 파괴가 쾌감을 주는 이유는, 어떠한 시점 이전에 그들의 삶은 재미없고 심심하기 때문이다. 틀에 박힌 삶에 끌려다니면서 생기를 잃은 주인공의 모습은 마치 파괴의 전제 조건인듯하다. 형태가 뚜렷한 삶이어야 파괴가 가능하다. 애초부터 형태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는 파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전자기기처럼 제 기능을 하기 위해 정교하게 짜인 일상은 약간의 일탈만으로도 여러 파편을 만들어낸다. 멋진 굉음과 함께.


파이트클럽.jpeg 파이트 클럽


루틴 속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강한 통제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일상의 대부분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벌어질 때는 강한 무기력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무기력감을 느낄 때 낭만적인 도망을 꿈꾼다. <졸업>의 마지막 장면처럼 다이나믹한 도주를 그려본다. 나를 쫓아오던 사람들이 이내 뜀박질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는 벙찐 얼굴을 상상한다. 하지만 그 이후의 장면은 상상할 수가 없다. 준비되지 않은 다이나믹한 도망 이후의 삶을, 비참하지 않은 방향으로 생각할 수 없다.


졸업.jpeg 졸업


파괴는 도망과 다르다. 자신의 삶을 강하게 내려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을 한 손에 강하게 쥐어야 한다. 그 목적이 무엇이든 자신의 삶을 강하게 쥐는 행위 자체는 자신이 자신의 삶의 주인임을 의미한다. 그 결과가 비록 셀 수 없는 파편이라 해도 말이다. 삶을 끌려다니기만 한 주인공이 자신의 삶을 직접 부수는 모습은 강한 쾌감을 준다. 삶을 파괴하기 시작하자 비로소 자신의 삶의 통제력을 얻고, 살아있음을 느끼는 주인공의 모습은 코미디 그 자체다.


떡이 된 얼굴에서 피어나는 미소,
일정한 템포로 걷는 도시 한복판에서 보이는 처량한 춤사위


그것이 내가 사랑하는 음울한 웃음이다.


나는 가끔 파괴도 꿈꾼다. 역시, 그 이후의 삶은 상상할 수 없지만, 어쩌면 그 결과가 비참함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제라도 내동댕이 칠 것처럼 한 손에 꽉 쥔 나의 삶을 바라보며 살 수 있기를 소망한다.


데몰리션 춤.jpeg 데몰리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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