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로움은 모든 상황을 살짝 더 아름답게 만든다

by 창문밖일요일

평일에 분당선 배차 간격은 생각보다 훨씬 더 길다. 내가 이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다. 무려 2년 동안 분당선의 지하에서 공익 근무를 했지만 어림도 없다. 직장인이 된 지 몇 개월밖에 안됐지만, 전전전 역에도 다음 열차가 보이지 않는 것이 그새 당황스러워졌나 보다. 오늘 나는 오랜만에 휴가를 썼다.




월요일에 휴가를 쓴 이유는 일요일에 느끼는 심란함을 하루 미루고자 하는 데 있었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다르게, 휴가 전날에 나는 평소의 일요일과 다름없이 심란했다. 그냥 하루 쉬고 싶은 마음에 별다른 계획을 세우지 않았는데, 무계획이 회사에 두고 온 업무를 그렇게 떠오르게 할 줄은 몰랐다. 일을 쉬는 기분은 안 나고 미룬 기분만 나서 마음이 편하지 않은데 별다른 계획도 없다니. 이런저런 아쉬움과 함께 밤늦게 까지 산책을 했다. 한때 산책은 나의 소소한 행복이었다. 길었던 걸음 끝에 '그래. 내일은 최근에 못했던 소소한 일들을 하자'라는 결론에 도착했다. 마음이 살짝 편해졌다.


첫 번째 소소한 일은 늦잠을 자는 것이다. 하지만 오전 11시가 넘도록 침대에 있는 것이 불편했다. 그렇다고 일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이러려고 휴가를 쓴 건데, 이러고 있는 게 불편하니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비몽사몽 하다 끝내 몸을 일으켰다.


집을 청소하고, 집을 나섰다. 목적지가 있었고, 가는 방법은 다양했다. 하지만 가장 빠른 지하철 이외에는 어떤 방법도 고려하지 않았는데, 그러다 카드를 찍기 직전에 배차 간격을 발견해 버린 것이다. 버스를 타야겠다고 생각했다. 비록 큰 계획이 없는 나지만, 휴가를 쓰고 지하철이나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곧바로 역에서 나와 버스를 탔다. 노래를 들으며 창밖을 바라보자 내가 버스에서의 시간을 얼마나 좋아했는지가 떠올랐다. 아침마다 출근을 위해 버스를 타는 나지만, 카드를 찍을 때와 좌석을 고를 때 외에는 거의 눈을 뜨지 않는다. 아침에 타는 버스는 내게 조금 시간이 많이 드는 순간 이동인 셈이다. 그래서 잊고 있었지만, 사실 버스는 순간을 그대로 느끼게 만드는 공간이다. 실시간으로 바뀌는 창밖의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그 순간이 온전하게 느껴진다.


여유로움은 모든 상황을 살짝 더 아름답게 만든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을 뽐내는 대상의 존재와 이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있는 존재의 조합이다. 무언가에 쫓기지 않는 상태일 때, 우리는 온전히 어떠한 대상을, 어떠한 순간을 받아들일 수 있다.


나는 꽤 자주 무언가에 쫓긴다는 느낌을 받는다. 무언가에 쫓길 때는 시간만 느껴진다. 시계 초침 소리가 크게 재생되는 거대한 헤드폰에 내 몸이 갇힌 것 같다. 생존을 위해 설계된 우리의 몸은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 때 그 감정 이외의 많은 것을 노이즈 캔슬링 한다. 안 쫓기고 살 수는 없다. 그리고 적당히 쫓겨야 나는 일을 해낼 수 있다. 극복해야 하고, 극복하느라 받은 상처에서 빨리 회복해야 한다.


극복하고 회복하기의 연속이다. 그 와중에 여유가 생긴다면, 순간을 향유하며 살고 싶다는 것이 나의 작은 소망이다. 향유란 버스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그 순간을 음미하는 것이다. 향유라는 것은 세상이 연출한 순간에 어울리는 BGM을 스스로 고를 수 있는 것이고, 향유한 그 순간은 먼 훗날 관람하게될 주마등의 한 컷이 될 수도 있다. 인생의 중대한 순간을 꼽는 질문에는 손가락, 발가락을 다 합쳐도 들어가지 않지만, 죽기 직전에 가장 그리워할 것 같은 그런 순간 말이다.


무계획의 휴가가 가져다준 여유로움은 버스 안에서 짧지만 풍만한 음미의 시간을 줬다. 그 순간에 알맞은 BGM까지 직접 고를 수 있었지만, 내 삶이 진짜 영화나 드라마였다면 아마 목적지를 무시하고 종점까지 가지 않았을까? 살짝은 아쉬워하며 버스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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