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살아가야해.

최엘비 - [독립음악]

by 창문밖일요일

하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미룰 수 있는 일들을 내일로 미루고, 퇴근 후 바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 하는 없었다. 하의 어머니로부터 주말 내내 탈이 나 고생하던 하가 결국 응급실에 실려갔고, 오늘은 수술까지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연이어 전해 들은 슬픈 소식에 걸쳐 있는 하에게 걱정 가득한 마음으로 전화를 했다. 같이 간 친구들 모두 번갈아 가면서 하와 목소리를 나눴다.


만만치 않은 수술을 거쳤음에도 하의 목소리에서는 생기가 남아 있었다. 그렇지만 며칠 사이에 목소리가 많이 야위었다는 인상을 지우기는 어려웠다. 자기에게는 이제 장기의 일부가 없다는 농담도 잊지 않았다. 하에게는 이제 소장의 일부가 없다. 한 번의 추가 수술을 더 거친 하를 퇴원 후 다시 만났을 때, 소장의 일부와 맞바꾼 생명력이 느껴졌다.

지옥 같은 2주를 보낸 하는 앞으로 건강과 자기 자신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삼고 살겠다는 당찬 출사표를 던졌다. 역시 메시지보다 메신저가 중요한가. 이 뻔한 말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메신저가 소장의 일부 정도는 내준 사람이어야 한다.


하의 최초 입원 후 그렇게 2개월가량의 시간이 흘렀다. 하가 금연을 시작한 지도 2개월이 지났다. 그의 손에 다시 담배가 쥐어지지 않기를 소망한다.



영이 형은 얼마 전 나의 대학교 동기에서 회사 동료가 되었다. 긴장과 설렘으로 가득 차 있는 그의 하루하루는 나에게도 신비로운 에너지를 준다. 또한, 짧은 시간 동안 정신없이 벌어지는 수많은 변화 속, 없는 정신을 차리려는 그의 노력이 느껴진다.


1년 전의 나도 그랬다. 취업계를 쓰기 위해 행정실/교수님과 연락하고, 애매하게 계약 기간이 남은 자취방에 몇 개월 동안 몸을 담아 줄 귀인을 찾고, 대학교 친구들과 술 한잔 하는 일까지. 이 모든 일을 2주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처리해야 했다. 입사하고 나서도 한동안은 신경 써야 했는데, 그것도 벌써 1년이 지났다. 한 시대가 끝나고, 한 시대가 새롭게 시작하는 시기. 길을 걷다가도 툭하면 추억에 빠지는 감상적인 나에게는 이런 전환의 시간이 빠르게 진행될수록 좋다. 안 그러면, 정말 힘들어진다. 그 정신없는 전환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나는 캠퍼스 구석구석을 누비며 나의 추억들에 예우를 다하는 일을 까먹지 않았다.


퇴근 후 술자리에서 만난 영이 형은 여전히 정신없어 보였지만, 대학생이라는 신분에 대한 미련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는 앞으로의 걱정만 술상 위에 잔뜩 늘어놓았다. 숨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참 나랑 비슷하면서도 다른 사람이다.


영이 형이 입사한 지 1개월가량의 시간이 흘렀다. 영이 형은 호기롭게, 하필 막 입사한 이 시점에 곧 금연을 시작할 계획이라고 말한다. 그의 손에서 어서 담배가 떨어지기를 소망한다.


효는 우리 중에 군대를 제일 늦게 갔다. 입대 3일 전, 단지 그를 놀리기 위해 10명이 넘는 사람이 모였다. 밤이 새도록, 쉼 없이 메들리로 그를 놀렸지만 하나하나 웃으면서 다 받아 내는 효는 역시 보통 놈이 아니었다. 하지만 끝없이 채워지는 잔까지 다 받아내지는 못했다. 알코올에 있어서 거절이란 것을 모르는 효는, 사장님이 주신 양주 한 잔을 들이키고는 우리 중 가장 먼저 빡빡머리를 식탁에 찍었다.


효는 그렇게 군대로 떠났다. 꽤나 자주 효가 떠올랐지만, 편지를 쓰지는 않았다. 걱정이 되지도 않았다. 개는 사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곳에서도 그 어떤 역경도 물렁하게 받아낼 것이다. 효는 내가 봐온 사람 중 손에 꼽을 정도로 무던한 사람이다. 주변 사람의 시선도 정말 신경 쓰지 않았다. 이번 생에는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나도 효처럼 살 것이라고 종종 다짐했다.


훈련소를 수료한 효에게 전화가 왔다. 당장이라도 동네에 가면 있을 것 같은 그의 목소리는 아무런 변함이 없었다. 5주 간의 훈련이 어째 그를 더 무던하게 만든 것 같았다. 지 할 얘기만 하고 들어갈 때가 됐다며 전화를 끊었다. 피식 웃음이 났다.


효가 군대에 간지도 5주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군대에서 담배를 많이들 시작한다고 그랬나. 다음에 봤을 때, 그가 담배를 물고 있지 않기를 소망한다.




최엘비의 [독립음악]은 나에게 의미가 큰 앨범이다. 부모님의 돈으로 잠시나마 혼자 살던 내가, 돈을 벌기는 시작 했지만 아직 혼자 살기에는 부족해 다시 부모님 집에서 살게 되면서. 진정한 독립에 대한 의미를 찾던 중 이 앨범이 나왔다. 스스로를 조연이라 칭했던 최엘비는 결국 스스로의 감독하에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독립했다. 컴플렉스라 여겼던 부분들을 표현했고, 그 표현들은 컴플렉스로부터 그를 자유롭게 만들었다. 그 표현으로 채워진 이 앨범은 진정 독립음악이라 불릴만하다.



이제 막 새롭게 발을 내디딘 나와 내 친구들에게 독립은 너무도 멀어 보인다. 지금은 멀게 느껴져도, 머지않아 다가올 것이라는 생각도 잘 들지 않는다. 간혹 고민을 나눌 때면, 점점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순간이 많아진다. 어떠한 상황에서는, 정말 어떠한 말도 의미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 내가 진지한 한 마디를 해야 할 타이밍인데, 그 한 마디가 조심스럽다. 고르고 고르다 한 마디가 떠올라도, 입 밖으로 꺼내기 망설여진다. 우리 모두 답을 모르고, 결국 언젠가는 각자의 방식으로 독립이 필요하다.

[독립음악] 중 가장 좋아하는 트랙을 묻는다면, 세상을 떠난 친구를 떠올리고 말을 건네는 '살아가야 해'를 고르고 싶다. 사실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살아가야해. 그게 침묵을 끝내고 내가 던지는 김 빠지는 한 마디가 될 것이다.

세상이 나를 때리는 것보단
죽는 게 훨씬 아플 테니까
그 누구보다 널 사랑해
네가 죽으면 내 눈에서 눈물이 안 마를 테니까
넌 그저 아프지 않게 살면 돼
비록 내가 보는 세상은 날 아프게 만들었지만
우리는 살아가야 해 넌 살아가야 해
- 최엘비, '살아가야해.'


하와 효, 영이 형이 떠오른다. 얘들아, 그래도 일단 살아가야해. 그다음은 모르겠지만, 우선은 계속 이렇게 살아가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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