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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원진 Jul 03. 2024

2007년 배낭여행 파리 - 파리는 향기다

파리는 갓 구워낸 빵의 향기로 유혹한다

2007. 7.22(일)


유럽 배낭여행길에 올랐다. 마트에서 퍼져나오는 갓 구운 빵의 구수한 향기에 행복감이 고조된다. 콩코르드 광장에서 단두대 공포정치 역사를 되새겨보고 샹제리제 거리를 한가롭게 거닐어 보았다. 


파리에서는 허름한 배낭여행자 숙소가 더 안전할 수 있다

몽마르트르 언덕 입구에 있는 이 호텔을 전초기지로 해서 3박 4일 파리 여행을 했다. 오래된 건물을 숙박시설로 개조했다. 1박에 45유로로 저렴했다. 단, TV 없고, 엘리베이터도 없다. 샤워와 용변은 방 밖으로 나가야 한다. 복도 한켠에 있는 공용 욕실과 화장실을 사용한다. 복도 천장에는 타이머가 작동하는 전등이 달려 있었다. 전기를 아낀다는 취지였겠지만 다소 불편했다. 샤워야 하루에 한 번으로 끝내니 별문제 없다. 그러나 화장실은 생리적 욕구가 생길 때마다 방 밖으로 나가야 하니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여행작가라는 별명을 가진 미국 작가 빌 브라이슨. 유럽 배낭여행기 「발칙한 유럽산책」에서 파리의 전등타이머에 대한 익살스러운 찬사를 보냈다.     


“호텔 복도의 조명 스위치는 전기 절약을 위해선지 모두 10~15초 후에 꺼지도록 맞춰져 있었다. 방이 승강기에서 가깝다면야 별문제가 안 되지만 복도 반대편 쪽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게다가 프랑스 호텔 복도는 치매 걸린 노인이 길 가듯이 구불구불해서, 마지막 200m가량은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 손바닥을 쫙 펴고 벽을 더듬으며 걸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모퉁이에 있는 테이블에 사타구니를 정통으로 부딪치기 일쑤다.(실은 그러라고 거기 뒀음에 틀림없다.) 문자 그대로 암중모색 중이던 손가락은 이따금 부드럽고 털이 난 뭔가를 더듬기도 한다. 잠시 후 알고 보면 당신이 더듬고 있던 것은 다른 투숙객이다.” -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Neither here nor there) - 04. 파리」     



파리는 향기다

이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호텔 몽텔리어는 배낭여행자에게는 최고의 숙소였다. 인근에 미니 슈퍼와 마트가 있어 우유, 바나나, 빵을 구입했다. 이 마트의 빵은 프랑스 빵의 진수를 제대로 보여줬다. 후각 마케팅 전략이었다. 매장 입구 바로 안쪽에 갓 구운 빵을 수북이 쌓아놓았는데, 구수한 향기가 건물 밖으로 퍼져나간다. 길을 가다가도 구수한 향기에 이끌려 마트 안으로 자연스럽게 빨려 들어가게 된다. 더욱 좋은 것은 속이 편했다. 아마도 마가린과 글루텐을 넣지 않아 그런 것 같다. 갓 구운 빵 한 덩어리를 사서 뜯어먹다 보면 한 덩어리가 금방 사라진다. 파리 마트의 곡물 식빵은 갓 구워냈을 때의 구수한 향기로 유혹하고 담백한 맛과 식감으로 행복감을 선사한다.  


  

호텔 가까이에 인터넷 카페가 있어 편리했다. 1.6유로를 내고 90분 인터넷에 접속했다. 다음 여행지 숙소를 변경한 것도, 집에 있는 아내에게 이메일을 주고받은 곳도 여기였다. 2009년 스마트폰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이전이라, 인터넷 카페가 나름의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던 때였다.        

   


콩코르드 광장

지하철로 이동해 콩코르드 광장으로 나왔다. 7월 말로 다가가면서 날씨는 다소 무더웠다. 콩코르드 광장에 들어서니 날씨와는 다르게 으스스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프랑스 근현대사에 주요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다. 1793. 1월 프랑스혁명 중에 루이 16세가 처형되었다. 프랑스혁명 세력으로, 공포정치를 주도한 로베스피에르는 단두대, 즉 기요틴 매니아였다. 혁명을 반대하는 세력을 탄압했을 뿐 아니라 혁명성이 의심된다는 혐의로 혁명 동지들에 대해서도 무자비한 숙청을 가했다.  


혁명재판소를 설치하여 1793년 4월부터 1794년 6월 10일까지 불과 14개월 동안 파리에서 약 1,251명을 단두대에서 처형했다. 6월 11일부터는 아예 심리를 거치지도 않은 약식 재판을 감행하여, 불과 47일 사이에 1,376명을 단두대로 보냈다.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로베스피에르 일파가 단두대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광기의 악순환이 끝났다.       


오벨리스크

콩코르드 광장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오벨리스크 첨탑이다. 먼저 저게 왜 여기에 있을까 의문이 든다. 나중에 조사해 보니, 약탈해 온 것은 아니고 명목상은 선물 받은 것이라 한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1898-1801년 이집트 침략전쟁을 떠난 것이 사실상 이집트 유물 약탈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전 세계 오벨리스크의 절반이 로마에 있고, 런던과 파리, 심지어 워싱턴 DC에도 이집트산 오벨리스크가 서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유럽 백인들은 왜 그토록 이집트산 방첩탑에 탐욕을 부렸을까 의문이다. 권력의 상징 또는 우세한 문명의 상징으로 내세울 무언가 필요했을 것이라 설명한다. 그렇다면 자체 공학기술로 새로이 만들어 내는 게 더 합당한 일이 아니었을까? 총칼을 앞세운 제국주의 시절에는 약탈하는 게 손쉬운 방안이었을 것이다. 


콩코르드 광장

콩코르드 광장

콩코르드 광장 조각상

오벨리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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