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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창윤 Oct 29. 2024

영어를 못하는데 영어 뮤지컬을 봐도 재밌을까?

2024. 10. 27.

뉴욕, 미국




뉴욕에 온 지 4일 차다. 뉴욕에 오면서 꼭 해보고 싶었던 것 중에 하나가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감상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도 공연문화를 종종 즐겼던 우리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브로드웨이에서 하는 뮤지컬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했었다.


다만 문제는 둘 다 영어를 잘 못한다는 것이었다. 리의 영어 말하기 수준은 간신히 식당에서 주문하고 숙소를 예약했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이며, 듣기 수준은 상대방이 말하는 문장 중 중학교 수준의 단어 정도만 알아듣고 대충 무슨 말을 하는지 문맥상 유추하는 정도이다. 여행을 다니며 익힌 생존영어 그 자체이며, 여행과 관련 없는 일상 회화는 조금만 어려운 단어들이 나와도 잘 알아듣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나마 익숙하고 어린아이들도 재밌게 본다고 하는 디즈니의 알라딘이라는 뮤지컬을 선택했다.




뉴 암스테르담 어터는 생각보다 컸다. 3층까지 있는 극장이었고, 눈대중으로 봤을 때 약 2천 석 정도가 있어 보였다. 공연이 인기가 많은지 거의 만석으로 보였다. 우리는 예산 풍족하지 않고 공연 전날 예매하기도 해서 2층 사이드 좌석에 앉게 되었다. 2층임에도 불구하고 시야가 괜찮았다. 다만 키 작은 여성 앞에 키 큰 남성이 앉으면 잘 안보이긴 한다. 아내가 혼자 왔다면 나와 자리를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없어 잘 못 봤을 것이다.


공연이 시작되고, 첫 배우가 나와 첫 대사를 읊으며 첫 노래를 하는데 뭔가 잘못되었단 것을 느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넉넉잡아 10프로 정도밖에 알아듣지 못했다. 옆자리의 아내를 보니 나랑 처지가 비슷해 보였다. 배우가 농담을 던지고 어린아이들을 포함해서 관객들 모두가 웃는데 우리만 이해 못 하고 웃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나만 못 웃는 게 아니라 아내도 같이 웃지 못해 뭔가 심리적 안정감이 들었다. 이런 생각이 들면 안 되지만 아내가 영어를 같이 못해 다행이다.


하지공연이 진행되면 될수록 배우들의 몸짓이나 표정, 분위기 등 비언어적 표현들 덕분에 스토리의 흐름은 이해가 되었다. 운율이 없는 대화가 아닌 춤과 노래를 감상하는 데는 언어의 비중이 낮아 꽤나 만족스러웠다. 특히 20명가량의 배우들이 단체로 옷의 분위기를 맞춰 입고 화음을 쌓으며 춤을 추는 장면들에서는 언어와는 전혀 상관없이 뮤지컬을 온전히 즐기며 극장공연에서만 느낄 수 있는 벅차오르는듯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공연을 다 본 후 글 제목의 물음에 대한 답은 명확했다.

영어를 몰라도 재밌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재밌다 보다는 좋았다가 맞는 것 같다.




다만 영어를 안다면 훨씬 더 좋았었을 것이라는 것은 무조건적인 사실이다. 어디선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지식이 많을수록 삶의 해상도올라간다.

나는 이 말을 참 좋아한다.


나는 건축설계 쪽에서 일을 하고 있다. 건축을 공부했던 시기와 일한 시기를 모두 합치면 10년 조금 안된다. 건축을 공부하기 전에는 친구 집에 놀러 가든, 길거리를 걷든, 카페나 식당에 들어가든 공간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건축이라는 분야에 대해 알아가면 갈수록 누군가의 집에 놀러 가도 방 구획에 따른 동선이 먼저 보이고, 길거리를 걸어도 건물들의 상층부까지 쳐다보게 되며, 카페나 식당을 들어가면 마감 디테일들을 나도 모르게 관찰하게 된다.


건축을 공부하기 전에 비해 똑같은 공간 안에 있어도 보이는 시야 폭이 훨씬 넓어졌으며, 느껴지는 감정 또한 풍부해졌다. 같은 공간을 시간을 두고 여러 번 가면 지나간 시간 동안 넓어진 시야로 인해 공간이 새롭게 보이는 신기한 현상도 마주한다. 공간을 바라보는 해상도가 높아진 것이다.


직접적으로 그러한 경험을 해보니 건축이 아닌 다른 분야들도 똑같을 것이라 자연스레 생각이 들게 된다. 세상을 바라볼 때는 내가 현재 알고 있는 여러 분야들의 지식을 복합적으로 섞어 바라보게 되며, 다양한 분야들을 익히면 익힐수록 내 삶의 해상도는 높아져 갈 것이다.


사실 그동안 삶에 치여 깊게 생각하지 않으며 살았는데 뮤지컬을 보며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 영어를 잘했다면 이번 뮤지컬뿐만 아니라 세계여행 전체의 질이 올라갔을 것이다. 아내와 나는 다시 한번 다짐한다. 다음엔 꼭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돌아오자고. 영어뿐만 아니라 어떤 분야든 공부는 꾸준히 하며 삶을 살아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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