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원한 캘리그래피 스승이신 최일섭 작가님의 냉정한 말. 그동안 실망을 안겨드린 일이 꽤나 많았지만 확실히 충격적이었다. 전업 작가로 뛰어들 용기는 아직 엄두도 안 나지만 캘리그래피를 나름 더 잘하고 싶은 열망이 많았던 내게는 청천벽력 같은 한마디였다. 불과 작년만 하더라도 적어도 본인만큼의 예술적 재능이 보인다고 칭찬하시더니... 뭐, 그래도 일이 생길 때마다 지도는 해주시겠다니까 다행이랄까.
처음 캘리그래피를 접한 건 6년 전이었다. 내가 일생을 속해 살아온 문화의 고유언어를 구조적으로 파괴하고 변화시킨 후 다시 조합하는 작업에 난 매료되었고 빠져들었다. 우리가 글씨라고 인식하는 '검은 글자'와 그 나머지 여백 역시 글씨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흰 글씨'로 인식해야 전체적으로 조화롭고 완성도 있는 작품이 나온다는 개념 역시 내 사고력을 확장시켰다. 화선지와 붓과 먹과 나. 이 안에 크고 작은 우주가 존재하는 느낌이었다. 어릴 때 배웠던 서예 경험을 바탕으로 나름 붓글씨를 쓴다고 생각해왔지만 붓을 자유자재로 사용한다는 것에는 얼마나 많은 연습과 수련의 시간이 필요한지 난생처음 깨달았다. 아직도 감도 안 잡힌다.
2020 한글날 기념 전시 출품작 ' 한글:알파벳'
난 그림, 자수, 디자인, 연기 등 꽤 많은 창작분야에 발을 담그고 있지만 캘리그래피에는 많은 애정과 집착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가 권한 것이 아닌 내가 찾아서 선택한 몇 안 되는 것들 중 하나이고, 그 분야 자체도 역사적, 문화적, 예술적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처럼 타이핑이 '쓰기'라는 행위의 주류가 된 현대에서 손으로 직접 뭔가를 적어 내려간다는 것은 인간이 잊어서는 안 되는 감수성을 지키는 일이라 생각한다. 서예라는 전통문화에서 파생된 예술분야에 직접 몸 담는다는 느낌도 전통문화를 현대적으로 진화시키고 유지해 나가는 방법으로 느껴진다.
이것은 요즘 내가 '생록(:생명을 기록하다) 프로젝트'라고 이름 붙이고 진행하고 있는 개인 자수 작업과도 닿아있다. 국내외에 사라져 가고 있는 생물들을 보존기간이 놓은 자수로 최대한 생생하게 남기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작업인데, 동양의 전통문화라는 것도 그렇고, 잊혀 가는 것을 이어나간 다는 노력이라는 것도 서로 닿아있다고 생각된다. 요즘은 자수와 캘리를 한 작업에서 같이 표현하고 있는 중이지만 그 완성도와 조화에 대해 평가를 하자면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느낀다.
생명다양성재단 소식지에 실리고 있는 작업들
글씨를 잘 쓴다는 것은 분명 성실한 노력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거기서 나는 완전히 낙제생이다. 선생님께 뭐 욕먹어도 싸다. 사람이 뭔가를 추구할 때 반드시 다른 누군가의 인정을 받는 것은 큰 의미는 없다고 생각한다만 지금부터라도 필력을 높여서 언젠가는 저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안 된다고 하니까 더 해보고 싶은 근성 내지 오기랄까.
지금 하고 있는 판소리극 탈제작 작업이 끝나면 선생님께 다시 한 잔을 청하면서 이야기를 나눠볼 생각이다. 내 남아있는 열정과 앞으로 더 발전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또 그만두라시면... 뭐, 혼자 더 열심히 하다가 좋은 술과 음식을 들고 한 번 더 트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