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만 더 불어주고 가거라
어릴 때부터 아무 이유 없이 좋아했던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구름이 움직이는 걸 멀뚱히 바라보기이고 또 하나는 바람이 세게 부는 날 나가서 노는 것이었다. 티셔츠가 뒤집어질 것 같은 센 바람 속에 있는 게 좋았다. 특히 여름에 부는 바람을 좋아했는데 머리 끝까지 바람이 느끼고 싶어서 매년 여름에는 머리를 밀어버렸었다. 한창 이성에 눈뜨게 되는 고1 때부터는 두상이 안 예쁘다는 것을 깨달아서 멈췄지만은, 지금 추억해 보면 퍽 이상해 보였을 것이다.
거센 바람을 온몸으로 받는 걸 좋아한다. 어릴 때 바람을 받으며 언덕을 내리 달릴 때에는 내 작은 몸이 연처럼 붕 띄워져서 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귓바퀴를 바람이 쓰다듬고 지나가면 다른 소리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순간도 있는데 그런 시간을 정말 좋아했다. 조금 더 큰 뒤 방황하던 시기에 헬멧 없이 친구 오토바이 뒤에 타고 질주했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 잠시 들었지만 잘못되면 죽는다는 불암감과 공포감이 금방 지워버렸었다.
몸만 크고 마음은 쇠해져 가는 건지 요즘에는 센 바람을 몸으로 받으면 대처법부터 생각하게 된다. 머리스타일은 망가지지 않았는지 유리창에 비춰보고, 간판이 떨어지면 어쩌나 길 바깥쪽으로 이동해서 걷고. 아무 생각 없이 자연이 주는 그 시원하고 청량한 부채질을 느낄 새도 없이 매 순간을 보내고 있는 게 아닌지 생각해본다.
머리를 잘랐다. 스타일링을 하나 안 하나 별 티도 안 나도록 짧게 잘라버렸다. 바람이 세게 불 때 신경 쓸 거리가 하나 줄어들었다. 어릴 때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 요즘. 올해 여름은 무풍 아니면 태풍이어서 꽤 짜증이 나있다. 이번 가을은 유난히 짧겠지만 쉬는 날에 하루 억새가 많은 곳에 가서 바람소리나 실컷 듣다 오려한다. 연이은 태풍이 끝나자마자 득달같이 온 가을이 조금은 천천히 떠나기를 바란다. 사람들은 포근한 봄바람이 좋다지만 난 더운 바람과 찬바람이 섞여있는 초가을의 바람을 사랑한다. 물론 태풍만 아니면 여름에 부는 바람이 최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