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하나 건사하기도 힘드네요
2020년쯤이었나, 병원에 가서 그렇게 진단받은 건 아니었지만 우울증 증세로 고생한 적이 있었다. 아침이 오는 게 극도로 싫었고, 출근할 때 타는 버스에 오르면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게 아니라, 갑자기 이 버스가 뒤집혀서 모두 다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냥 이 세상이 한순간 다 끝나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 생각이 얼마나 황당하고 어이없는 생각인지 잘 알고 있지만, 그땐 그럴 정신이 없었다.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지금 당장 내가 너무 힘드니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었달까.
그렇게 살기 싫은 순간에도 도로 위를 자유롭게 걸어 다니는 고양이를 보면 그게 그렇게 귀여울 수 없었다. 산책한다고 신나서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를 볼 때도 마찬가지로 귀여워 미칠 것 같았다. 마침 직장에는 강아지를 키우는 사람이 셋이나 됐는데, 각자 자기 강아지가 얼마나 귀여운지 어필할 때면 강아지 없이 사는 나는 쭈그리가 되어 우두커니 그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딱 이때쯤이었다.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진 게. 다만 나는 혼자 사는 게 아니었으니 가족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당연하게도, 강아지를 반대했다.
"안돼. 냄새나잖아. 털 날리고. 사람 털도 싫은데 동물 털이 웬 말이야."
틀린 말 하나 없는 엄마.
냄새에 극도로 민감한 누나.
애정 표현이 어딘가 뒤틀린 아빠.
삼박자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며 당연히 나의 의견은 밟혔다. 나도 알고 있었다. 우리 집은 당연히 반대할 거라는 걸. 우울증에 반려동물이 좋대. 내가 지금 너무 힘들어서 그래. 내가 퇴근하고 산책도 시키고 목욕도 시키면 되잖아. 다른 생각 좀 못하게 강아지 한 마리만 키우자. 응?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 이런 나의 강아지 키우자 타령은 한동안 계속되었지만 육아 경력 3N 년의 엄마는 나를 너무나 잘 알고 계셨다. 응, 안돼.
어릴 때부터 동물이건 식물이건 뭐 하나 키우는 거에는 재주가 없던 나는 당연히, 지금은 아무것도 키우고 있지 않다. 생각해 보면 참 웃기다. 내가 우울증이고 뭐고 간에, 내 문제를 반려동물로 해결한다는 그 생각 자체가. 나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마당에 내가 무슨 다른 생명을 키우겠다고. 그때 만약 반려동물을 집에 들였다면 그냥 불쌍한 생명 하나가 우리 집에 들어온 것뿐이었을 거다.
지금의 난, 그저 길에 돌아다니는 고양이에게 가끔 츄르를 주고, 집에서 먹다 남은 닭가슴살이 있으면 데쳐서 고양이 밥그릇에 놓아주는 정도의, 딱 그 정도의 사람이다. 역시 생명을 거둔다는 건 함부로 생각해선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