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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병찬 Nov 04. 2020

생강 수확과 꼬마농부의 땡땡이

29. 산이 할머니네 이야기

때맞춰 아이가 왔다. 내일모레 기온이 영하로 내려간다 하여 생강 걷이를 고민하던 터였다. 파종할 때 손을 보탰고, 생강이 절반인 뒷마당 한 뺨 수박씨 사과밭의 주인공도 아이인지라, 당연히 아이는 참여해야 했다. 그동안 아이의 반응이 어떨까 궁금하곤 했다. 

게다가 올해는 생강 농사가 제법이다. 예년엔 씨생강 한쪽에서 대가 기껏해야 서너 개였지만 올해는 많게는 열 개까지 올렸다. 게다가 볕 바른 곳에서 자란 쪽대처럼 시퍼렇고 무성하다. 할아버지의 실력을 아이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생강은 대형 화분엔 너댓 뿌리 심는 게 고작이었다. 파종이 늦고 생장기간이 길기 때문에 생강을 심으면 가을 농사를 포기해야 했다. 조금 심었는데도 게으름 탓인지, 흙 탓인지 생강 소출은 기대 이하였다. 뿌린 것의 두 배 정도에 그쳤다. 농부는 연장이나 흙 탓을 하지 않는다는데, 핑계 댈 것만 찾았다. 

문제는 가을에 김장용으로 심은 무, 총각무, 쪽파도 신통찮았다는 것이다. 무는 총각김치에나 쓸 정도였다. 다행히 이파리가 무성해서 시레기 엮어 말리는 것으로 만족했다. 총각무도 알이 엄지손가락 크기에 불과했고, 쪽파는 성한 게 별로 없었다. 그래서 올봄엔 가을 상추 심을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생강을 심었다. 

그저 놀 생각이고 노는 게 좋다.

특별히 공을 들인 것은 없었다. 산이 똥과 음식물 부산물 등으로 만든 퇴비를 넉넉히 주고, 쉽게 건조해지는 밭에 물을 자주 줘 습도를 유지해준 것 이외에는 없었다. 어림짐작으로 수확량이 씨생강의 최소 다섯배 이상은 될 것 같았다. 도시농부로서는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누구에게 나의 실력과 보람을 자랑할 것인가. 유일한 대상이 아이였다. 생강 수확 날짜를 잡는데 고심했던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아이가 오는 날에 맞춰야 하는데, 이틀 뒤엔 영하로 떨어진다니 진퇴양난이었다. 생강은 일단 서리를 맞으면 쉽게 썩어버린다. 아이가 때맞춰 찾아온 것은 하늘의 은총이었다. 

아이가 오자마자 생강밭으로 데려갔다. 오늘은 생강 추수하는 날. 뿌리를 캐면 도깨비 뿔 같은 것들이 들쭉날쭉 뭉쳐 있다. 그걸로 김치 만들 때도 쓰고, 생강차로 만들어 감기 쫓아내는 데 쓰기도 하고. 그러나 아이는 시큰둥했다. 오늘은 할아버지가 또 어디에 나를 끌어들이려는 거지? 생강? 생강차? 그게 뭐야. 내가 좋아하는 건 편의점에 다 있는데. 우리 집 근처엔 편의점이 4개나 있어 내가 좋아하는 건 무엇이든 살 수 있단 말이야. 생강이 뭐 초코렛이라도 되나? 나는 산이랑 놀러왔을 뿐이거든. 아이는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나 옷 벗을래. 아이는 옷 핑계를 대고 냉큼 집으로 들어갔다. 

올봄만 해도 아이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이끄는 대로 따라다녔다. 밭에 가자면 밭에 가고, 민들레 찾아보자면 민들레꽃 찾고, 나비가 오나 새가 날아오나 보자고 하면 따라 나왔다. 상추 모종 심을 때는 저도 손에 흙을 묻혀가며 거들곤 했다. 그런데 아이는 7개월 전 그 아이가 아니었다. 이제는 제가 하고 싶은 것만 찾아다녔다. 땡땡이가 아예 몸에 뱄다. 이럴 때 치라고 가르친 게 아닌데~.

일 좀 해라, 일!

‘농사꾼 할아버지’를 자랑하려던 계획은 접었다. 아이가 그저 수확에 동참했다는 표시만 내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티브이 어린이 프로그램을 찾아보는 아이를 감언이설로 유혹했다. 역시 통하는 건 국수다. 생강 빨리 캐고 고기국수 먹으러 가자. 주원이가 도와주지 않으면 국수 먹으러 갈 수 없어.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나와서도 일할 생각은 없다. 생강 근처엔 가려고 하지 않는다. 산이랑 놀 궁리뿐이다. 부르면 딴청부리고, 쫓아가면 도망간다. ‘방퉁아, 생강 빨리 뽑아야 빨리 국수 먹지!’ 제야 할머니와 생강 대를 잡고 힘주는 시늉도 하고, 땅속에 남아 있는 생강을 꺼낸다. 하지만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으로 마지못해 생강을 집어 올리는 등 일하는 게 영 개갈 안 났다.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건지기도 힘들었다. ‘꼬마 농부’로 키우려는 꿈은 할아버지의 빗나간 욕심인가?

생강 뽑기 전, 아무런 감동도 감흥도 없다

대를 잘라내고 생강만 추려 광에 옮기는 것으로 갈무리를 마쳤다. 늦게 시작하기도 했지만, 이미 날이 어두워졌다. 땡땡이가 밉기도 하고, 어둠 속에 국수 먹으러 가기도 귀찮아졌다. 심통이 난 것이다. 아이 눈치를 보면서 슬쩍 떠봤다. 방퉁아, 집에서 떡볶이와 라면은 어때? 

아이에겐 특별한 덕성이 하나 있다. 국수에 관한 한 완전한 평등주의자라는 것이다. 고기국수든 명동칼국수든 멸치국수든 라면이든, 아이는 어떤 국수도 차별하지 않는다. 국수라면 무엇이든 좋다. 라면은 짜고 맵고 인공감미료가 걱정됐지만, 집에 있는 날이면 한 끼 이상 반드시 끓여 먹는 제 아빠의 라면 사랑 때문에 아이도 거의 중독이 됐다. 떡볶이는 제 엄마가 주식처럼 먹는 것이어서 아이에게도 인이 박였다. 물에 빨아 주기만 하면 된다. 

라면과 떡볶이로 배가 그득했다. 집 생각이 솔솔 나나 보다. “엄마, 아빠는 언제 와?” “오늘은 늦게 일이 끝난대.” 지난 추석 때까지만 해도 아이는 산이네만 오면 자고 간다고 떼를 썼다. 엄마 아빠가 돌아간다고 해도 저 혼자 자고 가겠다고 냉정하게 잘랐다. 그러던 아이가 이제는 해지면 집에 갈 생각을 한다. 알 수 없는 변화다.

끼어들지 않을 수 없다. “내일 가면 안 될까? 오늘은 여기서 자고.” “안 돼.” “왜?” “밖에서 자면 안 된다고 왕할머니가 그랬잖아. 할머니도 그랬고.” “엄마도 여기서 자면 되잖아.” “아빠가 우리 집으로 올 건데.” 더 건드렸다가는 심술이 날 것 같다. 내일 생강술 생강고 생강가루 등 가공 과정까지 지켜보게 하려 했던 계획은 포기해야 했다. 아이는 할머니 차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시간이 빨리 가는 걸까 아니면 아이가 과속 성장하는 걸까. 내년이면 아이는 얼마나 클까, 아니 얼마나 바뀔까? 도대체 가늠할 수가 없다.     

생강 소출은 과연 기대 이상이었다. 파종한 씨생강은 1.5㎏이었는데, 소출은 7㎏이 넘었다. 이 정도면 전업으로 나서도 되는 것 아닌가 싶다. 그러나 한 평에 1500만 원 정도 되는 땅에서 ‘그까짓’ 소출을 바라고 누가 농사를 지을까. 땅값이 오르면 농사지을 마음이 없어지는 건 인지상정일 것 같다. 

김장용 및 양념용을 제외하고도 생강이 6㎏ 정도 남았다. 남은 것은 앞서 수확한 대추 말린 것과 함께 생강대추고와 생강가루를 만들고, 생강에서 즙을 짜내고 남은 건지(건데기)로는 생강술을 만들었다. 제대로 만든 것인지는 몰라도 대추생강고만 8㎏ 정도 나왔다. 말린 대추 2㎏, 설탕 3㎏ 정도가 들어갔으니 대강 맞는 수치다. 1㎏에 7만 원 정도 한다는 대추생강고의 시중가를 생각하니 부자가 된 것 같다. 편으로 썬 뒤 건조기에 말려 믹서로 간 생강가루는 3홉 정도 나왔다. 착즙기로 즙을 두 번이나 빼내고 남은 

건지는 5홉 정도나 됐다. 술마 붓고 숙성시키면 1년 내 쓸 수 있는 양이다. 마지막으로 생강대를 밑에서 검지 만큼 잘라 깨끗이 씻어 말린 뒤, 남은 담근술 술통에 넣었다. 이 술은 온전히 내 몫이다. 

고와 가루 술을 온갖 병에 넣고 보니, 김치냉장고 여닫이 뚜껑 위가 가득하다. 하나하나 이름표를 붙인다. 마곡동, 홍은동, 길동, 딸네, 아들네, 처남과 기타 등등. 브랜드는 ‘코로나 안녕’이다. 생강과 대추는 성질이 따듯해 몸을 덥혀준다니, 여기 모든 분들 생강대추고 차로 체온 잔뜩 올려, 올겨울 코로나19, 독감, 감기 모두 물리치고 건강하시길! 나는 병만 봐도 마음이 뜨듯해졌다. 

내년에도 생강에 주력해야겠다. 인생 후반을 아예 생강에 맡겨보는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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