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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병찬 Nov 13. 2020

평창동 42번지의 참변과 제주면장

30. 산이 할머니네 이야기

근대화슈퍼에서 50m쯤 내려오면 세검정 삼거리다. 1968년 북한의 124군 부대 대남침투조가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시내버스를 강탈한 곳이다. 김신조 무리는 청와대가 지척인 자하문고개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교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순직한 최규식 총경과 김종수 경사의 동상과 흉상이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삼거리 건널목을 건너면 상명대로 올라가는 다리다. 인왕산 쪽 건너편 산기슭은 내가 살던 개천가 4번째 집이다. 세검정에 와서 처음으로 안방에서 산 곳이다. 작은 대청에 마당까지 딸려 있었다. 길 따라 집 다섯 채만 지나면 대원군의 별장 석파정의 별채 석파랑이 있다. 4번째 집터엔 한때 중국집이 입주한 2층 건물이 들어서기도 했지만, 지금은 모두 헐렸다. 대신 수도권광역급행철도 A노선 환기구와 함께 인명대피소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상명대 다리에 서면 1972년 여름 그 잔인했던 물난리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서울에서 마지막 고등학교 입학시험를 앞두고 있었던 터라, 여름방학에도 학교 수업이 있었다. 8월 19일 토요일이었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자하문고개를 넘어 집까지 걸어왔다. 효자동, 궁정동, 청운동, 부암동을 거치는 그 길은 마음이 새털처럼 가벼웠던 소년에겐 일도 어니었다.

삼거리에 도착해보니 다리 위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건널목 건너 부리나케 다리로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뭔지 모르고 나도 그 틈에 끼었다. 수근대는 이야기를 들으니 교각에 걸린 주검 한 구를 건졌다는 것이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궁금했다. 도대체 주검의 모습이란 어떤 것일까. 빙 둘러서 있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여자였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었다. 다친 곳도 없어 보였다.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고요하고 깨끗했다. 평창동에서부터 떠내려 왔다는데 신기했다.

사람들 이야기를 정리하면 저초지종은 이러했다. 간밤에 비가 무지하게 쏟아진 것까지는 인다. 평창동 계곡 수영장 인근 마을에 집채보다 더 큰 물이 덮쳐 난리가 났고 수십명이 죽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물난리가 날 수 없는 또랑 옆 마을을 쓸고간 이유에 대해선 말을 아꼈지만, 요컨대 인재라는 것이었다.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 뒷덜미까지 습격하고 나서 북악산 세검정 산록에 경비시설 공사가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5부능선쯤을 따라 초소와 교통호 등이 지어졌다. 문제의 계곡 위쪽으로는 군인 막사도 들어서고 심지어 사격 시설도 지어졌다. 문제는 군인들이 산을 깎고 고목들을 베어버리면서 흙과 나무를 계곡에 마구 버렸다. 계곡 곳곳엔 졸지에 댐 아닌 댐들이 생겼다. 그것이 하룻밤 사이에 수백 ㎜ 쏟아진 서울 관측사상 최고라는 폭우로 말미암아 한꺼번에 터졌다. 물과 함께 떠내려온 토사와 나무들은 개울가 가옥들을 덮치고 쓸어버렸다는 것이다.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는 없었다. 신문이나 방송에는 나오지 않은 이야기였다. 매체들은 월요일에야 사고 내용과 원인을 이렇게 간단히 전했다.

18일 밤부터 19일 새벽까지 453㎜의 비가 쏟아졌는데 평창동 42번지 가구 13동 30가구가 휩쓸려 21일 현재 39명이 사망하고 46명이 실종됐다. 42번지에는 36가구 183명이 살고 있었다. 사고 원인은 폭우로 팔각정 인근 북악스카이웨이가 25m쯤 함몰되면서 토사와 나무들이 500m 계곡 밑으로 쏟아져 내려간 산사태 때문이었다!

저 다리에서도 세 주검이 인양됐다.

동네 아저씨들 이야기와는 사뭇 달랐다. 북악스카이웨이가 무너져 산사태가 났고, 그 토사가 500m나 쓸려 내려와 마을을 덮쳤다는 것은 미심쩍었다. 산사태가 문제라면 개울 따라 주검 수십 구가 밀려내려올 리 없었다. 그 자리에 덮였겠지...

그러나 정부 발표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다들 그러려니 했다. 유족들의 아우성도 사나흘 지나자 묻혀 버렸다. 야근 덕택에 가족을 몽땅 잃고 저만 살아남은 아저씨, 임신한 아내를 잃고 혼절한 남정네의 통절한 이야기, 무너진 집에 깔려 세상을 떠난 세 아이 이야기도 동네 사람 입줄에 잠깐 오르다 사라졌다.

그렇게 묻혀 버린 이 미증유의 물난리를 아직 기억하는 이는 세검정 토박이 몇몇을 제외하고는 없다. 평창동 42번지 일대 어디에도 그런 비극을 기억하는 흔적은 없다. 상명대 다리를 건널 때마다 내 기억 속에서, 하얗게 침묵하던 그 여인의 주검과 함께 불현듯 떠오를 뿐이다. 평창동42번지의 참변은 유신 총통제로 넘어가던 해 여름, '박통' 시절의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작은 흑역사 가운데 하나였다.

대청이 있던 집에선 1년도 못 살았다 곧 홍지문을 뒷담 삼았던 집으로 이사갔고, 그곳에서 한겨울을 나고, 오간수문 건너 한양 외성을 앞 담으로 삼았던 집으로 이사갔다. 방 두 칸에 신혼살림을 하던 큰형 부부와 우리 세 식구가 함께 지냈다.

너무나 터무니없는 동거였던지라 형님 부부가 먼저 홍제천 따라 홍은동으로 이사갔고 이듬해 합쳤다. 홍은동에서 두 번 더 집을 옮긴 뒤, 1986년 결혼하면서 홍제(세검정)천 개울가 동네를 떠났다. 강서구 마곡동 처가 근처로 이사갔다가 1992년 돌아왔다. 돌아온 첫 집이 42번지 바로 윗동네인 64번지 개천 옆 빌라였다. 여름철 유원지였던 옥수산장까지는 10분도 안 걸리는 곳이었고, 단지 옆 능선을 오르면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까지 넉넉잡아 30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딸 아들이 초등학생일 때 아이스크림으로 유혹해 산책 다니던 곳이 팔각정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이스크림은 아이들 홀리는 요술방망이다.

오늘은 아이와 오래 걸었다. 나는 쌉쌀한 기억으로 마음이 무거웠고, 아이는 아이스크림 약발도 다 떨어져 다리가 무겁다. 마침 다리 위 정거장에서 마을버스가 떠나려 한다. 아이와 할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일단 출발하면 좀처럼 세우지 않는 버스지만, 한 승객이 아이가 뛰어온다며 버스를 세운 덕에 겨우 탔다고 한다.

나는 산이의 목줄을 쥐고 오십이삼 년 전 그렇게 가기 싫었던 상명대 비탈길을 오른다. 코로나19 때문인지 오르내리는 학생이 한 명도 없다. 그때 같았으면 다행이었겠지만, 지금은 아쉽다. 가을바람처럼 팔랑대는 아이들의 생기발랄 웃음소리가 없다 보니 비탈길이 힘들고 숨가쁘다.

제주면장 뒤, 그때 그 개울

다음에 평창동으로 산책을 가면 할아버지의 가슴 한구석에 옹이처럼 박혀 있는 그 이야기를 아이에게 해줘야겠다. 아이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는 못하겠지만 평창동 참변 때 손녀 또래의 많은 아이들도 희생됐다는 사실만큼은 새겨들을 것이다. 아이들은 권력자들의 부주의로 날벼락을 맞아 짧은 이승의 삶을 마쳤다. 그들의 폭력적인 입막음으로 그나마 해원도 못하고 잊혀졌다.

지금도 42번지 현장엔 적지않은 아이들이 산다. 슬픈 이야기지만,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그런 참변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 동네에선 집값 떨어질라 쉬쉬하겠지만...

우리 아이에게는 말할 기회가 곧 있을 것이다. 국수를 좋아하는 아이는 평창동 42번지와 잇닿아 있는 아랫마을 제주면장의 고기국수를 좋아한다. 외갓집에 올 때면 아이의 머릿속엔 제주면장의 고기국수 먹기 일정에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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