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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병찬 Jan 31. 2023

할아버지, 브런치 하자

88. 산이 할머니네 이야기

누구나 그렇겠지만, 아이들은 기쁨을 무엇보다 몸짓으로 표현한다. 춤이다. 

그런데 아이의 춤은 발달하는 게 아니라 퇴행하는 것 같다. 젖먹이 때 아이는 기분 좋으면 단순한 2박자 리듬에라도 맞춰 손을 흔들거나 궁둥이를 씰룩거렸다. 티브이를 보기 시작할 때부터는 영상 속 춤을 흉내 내기 위해 기를 썼다. 어린이집 다니면서는 예쁜 몸짓에 꽂혀 발레 학원엘 다녔다. 집에 오면 앙바, 앙바, 턴 하며 최대한 우아하게 몸을 놀리려 했다. 

개다리춤, 힘주면 방구 나와. 조심해

그런 노력이 유치원엘 가면서부터 싹 사라지고 정체 혹은 출처 불명의 괴상한 몸짓으로 대체됐다. 개다리나 개코원숭이 춤은 물론이고 힙합 같기도 하고, 몸부림 같기도 한 막춤이다. 아이 집에서 윷놀이에서 이겼을 때도 그랬다. 펄쩍펄쩍 뛰거나, 내의를 뒤집어 머리에 쓰고 소리 지르는 등 난리를 죽였다. 보다못해 스마트폰 카메라를 들이댔다. 그 산만함을 담아뒀다가 써먹을 요량이었다. 

그러자 아이가 춤을 멈추곤 한마디 했다. 

“할아버지, 또 브런치에 올리려는 거지?”

엥? 할아버지 입이 함지박처럼 벌어졌다.     

올해 들어 아이 이야기가 부쩍 많아졌다. 1월에만 벌써 네 번째다. 12월 31일 자정 무렵 올린 것까지 합치면 5차례다. 지난 연말까지만 해도 한 달에 두 번 정도였으니 폭발적인 증가세다. 두 자리밖에 안 되는 독자들이지만 귀찮겠다. 의아스러워할 사람도 있겠다.

그렇다, 사연이 있다. 

주원이는 개코원숭이.

아이 입에서 ‘브런치’란 말이 나올 때 게슴츠레한 머릿속에 갑자기 플래시가 터졌다. 쟤가 어떻게 브런치에 제 이야기와 사진이 올라가는 걸 알았지? 올리기 시작한 지 4년째지만 아이 입에서 브런치란 말이 나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감동할 일이 별로 없는 할배 마음이 감동으로 꿈틀거리기도 했다. 아이가 드디어 곰탱이 할배의 수고를 알아주는구나. 

사실 ‘산이 할머니네 이야기’는 아이에게 보내는 일종의 편지였다. 최후의 독자는 아이였다. 글 덕분에 딸의 엄마 아빠나 아내로부터, 엷어졌던 신뢰를 되찾고, 소원해진 거리도 좁힐 수 있었고 때로는 칭찬도 받았다. 그러나 최종적인 독자의 반응이 없었으니,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아이가 언제나 할아버지가 기록한 저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을까. 그 기록이 아이가 커가면서 저를 보는 거울이 되면 좋을 텐데~.

그 뒤부터 아이는 할아버지만 보면 ‘브런치 하자’고 조른다. 피아노 학원에서 보습학원으로 이동할 때도 그랬고, 집에서 할머니가 저녁을 할 때도 그랬고, 밥을 먹고 나서도 그랬다. 

백조처럼 출 때도 있었지.

“할아버지, 그거 있잖아. ‘선물은 할머니가 줬는데 잔소리는 할아버지가 다 한다’는 거. 그거 나 읽었어. 선물은 할머니, 잔소리는 할아버지, 랄랄라.” 

86화에 나오는 사진 설명이었다.

“그건 봤으니까, 이제 다른 거.”

아이는 할아버지 곁에 바싹 붙어 할아버지 핸드폰으로 제 이야기들을 본다. 그래, 읽는 게 아니라 본다. 아이는 본문을 읽지 않는다. 사진과 사진 설명 그리고 제목만 보고 넘긴다. ‘선물은 할머니, 잔소리는 할아버지’도 사진 설명이다. 에피소드 하나 ‘보는데’ 10초 정도면 끝난다. 할아버지가 본문 쓰고 사진 추리고, 편집하는데 하루 정도는 걸린 건데~,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아이가 봐주기라도 하는 게 어딘가. 할아버지는 어지간히 감격스럽다. 화면을 쏜살같이 넘기는 아이를 안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런데 아이와 그렇게 몇 차례 브런치를 하고 나니 재고가 떨어졌다. 80여회를 다 훓었다. 그 뒤부턴 아이가 브런치를 하자고 할 때마다 초조해진다. 한 달에 두 번 올리는 것으로는 아이의 기대를 채워줄 수 없었다. ‘그거 다 봤는데~.’ 실망이 반복되다 보면 아이 마음속에서 산이 할머니네 이야기에 대한 기대가 사라질 수도 있다. 

부산을 떨게 된 사연이다. 심지어 부산 떨 수밖에 없는 이유까지도 에피소드로 올리는 까닭이다.

이렇게 같이 놀긴 하지만

아마도 브런치 효과일 것이다. 설 앞두고 엄마가 독감 걸렸을 때 편지를 석 장 썼다. 엄마 아빠에게 각각 한 통씩,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한 통. 우리에게 보낸 편지 내용은 이렇다. “할머니 물론 할아버지도 먼길 오느라 힘들지 내가 대신 다해주고 싶다. 고마워요 나때매. 그리고 엄마 아빠 때메. 힘들겠다 생각만 해도 사랑해요.” 할머니만 쓰려다 보니 할아버지가 마음에 걸렸나 보다. ‘물론 할아버지도’ 꼽사리로 붙여줬다. 아이의 마음속에 할아버지도 이제 어엿하게 한 자리 차지하게 됐다. 

물론 엄마 아빠에 대한 마음과는 비교할 수 없다. ‘엄마에게’ “엄마 아프지마. 하늘만큼 땅 만큼 우주만큼 사랑해 아프지마 아프면 나도 속상하자나. 절대로 아프지마. 건강해서 많이 많이 놀자. 주원이가.” ‘아빠에게’. “아빠 복직해서 이제 더 힘들겠다. 엄청 엄청 사랑해 나중에 시간 또 되면 지금보다 훨씬 더 놀자. (아빠도 혹시 몰라 아프지마~)”

술취해도 아빠가 최고다

엊그제 아이 엄마 아빠가 회사 일로 귀가가 늦었다. 아이는 해가 지고 저녁을 먹고 난 뒤부터는 심드렁했다. 우리와 놀지도 않고 제 방에 들어갔다. 그러건 말건 할아버지는 티브이 삼매경에 빠졌다. 티브이가 세검정 집에는 없으니, 아이네 와서야 ‘얻어 건질 수 있는 게’(아이의 표현이다) 티브이 혹은 넷플릭스 시청이다. 

30~40분쯤 지나아이가 거실로 나왔다. 아이가 안방에 간 사이 슬그머니 방안에 들어가 보았다. 그림일기 1장이 책상에 놓여 있다. “혼자 노는 것은 너무 힘들어. 엄마아빠 빨리 왔으면 좋겠다.” 네모 칸 안에 혼자인 아이의 말풍선은 이렇다. “시시해.” 

별의별 짓을 다 해도 할머니 할아버지는 시시하다. 아이가 일단 엄마 아빠 생각에 빠지면 그림자나 다름없다. 그래도 그림자라도 어딘가. 시시하긴 해도 무서움은 덜어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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