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
어릴 때 교회와 성당엘 가끔씩 다녀 보다가 온 가족이 교회에 나가던 대학생 무렵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대학 다닐 땐데 한인 교회에 다니면서 처음으로 청년회 수련회도 가보고 세례도 받으며 제대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중년이 된 지금 나는 주중에는 사이비 신자로 살지만 주일 예배에 출석하는 것과 내가 할 수 있는 봉사와 헌금을 드리는 정도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중국에 가게 되면서 이 정도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운남대학교와 체결한 <방문학자/ 교환교수 근로 계약서>에는 굳이 종교에 관한 항목을 삽입하면서 나에게
<중국에서 네가 신앙생활을 할 자유가 있고, 보호될 것>이지만
나 역시 <중국의 문화와 종교에 관한 규정들을 잘 따라야> 하고 <중국인과 중국 학생들에게 종교에 관한 어떠한 내용과 교리 전파, 포교 활동을 엄격하게 금지>한다는 내용을 분명히 했다.
즉, 네가 한인 교회 다니고 예수 믿는 걸 문제 삼지 않겠지만, 네가 믿는 종교를 자국민에게 포교하면 안 된다는 조항이고 나는 여기에 서명을 해야만 했다.
중국에서는 모든 한국인을 잠재적인 '선교사'로 보고 있으며 은연중에 포교를 할 가능성이 아주 높은 요주의 요시찰 집단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중국인들의 종교에 관한 과민한 반응은 기독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 공평하게 탄압을 주고 있어서 불교, 가톨릭, 이슬람교 역시 어려운 지경이라고 한다. 공자의 사상과 가르침을 배우는 것만 자유로운 것 같았다.
쿤밍에는 한인 교회가 딱 하나 있었고, 내 아이들이 다니는 한인 국제 학교 역시 교회와 연관된 학교여서 결국 아이들의 선생님들과 학부모들 대부분은 한인교회 교인들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학생들은 대부분 선교사의 자녀들이었고 한인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선교사였다. 한국에서 중국에 파송 나간 선교사들 얘기를 귀동냥해서 들은 적이 있었는데 탄압이 몹시 심하다는 것과 그럼에도 열심히 선교 활동을 하고 있다는 소식들이었다.
여기 와서 직접 그들을 대면해 보니 사정들이 딱했다.
중국인들의 감시와 사찰은 어마무시했고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늘 감시의 대상이어서 우리가 갔을 때는 거의 모든 선교 활동이 중단된 상태였다. 더 이상 뭔가의 액션을 했다면 바로 추방당할 수 있는 상태여서 이들은 살얼음 판을 걷는 아슬아슬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 모두를 선교사라고 한 번에 부르기에는 각자의 상황들이 다 달랐던 것 같다.
한국 교회나 선교단체에서 지원을 받는 사정이 좀 나은 분들도 있었지만 거의 자비량으로 근근이 생활을 유지하는 분들도 있었다.
중국 선교를 위해 어린 학창 시절부터 기도하고 준비해서 유창한 중국어와 소수민족 언어까지 준비하신 분들도 있지만, 사실 그런 분들은 소수이고 중국어 실력이 나와 거의 비슷한 지경이어서 통역 없이는 선교활동이 불가능한 분들이 대부분인 듯싶었다.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던 한국 거리의 말일성도 교회 선교사들이 떠 올랐다. 저 정도 준비는 해서 와야 선교가 되든지 말든지 할 텐데...
선교사들은 가끔씩 본국에서 목회자들이 방문을 하면 자신의 선교 업적을 보여줘야 하는데 그러자니 어려운 환경임을 강조해야 했고 그러다 보니 실제 거주지와 보여주는 거주지를 따로 갖고 있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한국 교회에서는 파송 나온 선교사는 가난하고 없이 살아야 한다고 믿고 있는데 주상복합 아파트 고층에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가면 당장 선교지원금이 줄거나 끊긴다는 말도 들었다.
선교사가 자가용이 있거나 냉장고가 있는 집에 살면 이상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21세기에 아직도 한국 선교사는 영화 <미션>의 선교사들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쿤밍 한인교회에 등록하고 다니기 시작하자마자 그 유명한 김동호 목사님이 방문하셔서 사경회를 3일 동안 가졌다.
내가 예전에 동안 교회에 몇 번 나가서 주일 말씀을 들은 적이 있고 페이스북 선교 글을 자주 본 기억이 있어서 말씀 후에 따로 인사를 드렸다.
김동호 목사님은 주일 예배를 낡은 3류 호텔을 빌려 예배드리는 쿤밍 한인 교회 예배당의 남루한 모습을 지적하시며 성전답게 치장을 좀 하라고 야단치셨다.
착하고 여린 담임목사님은 곧바로 성전 치장 작업에 들어가서 특별 헌금 모금도 하고 그동안 모아둔 예산도 들여서 주일 몇 시간 빌려서 사용하는 허름한 홀을 번쩍번쩍하는 이상한 분위기로 단장을 하셨다.
더럽고 지저분했던 예배당, 십자가도 못 걸고 예배드리는 예배당이 조금 나아졌다.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에서 월급을 받았을 때, 두 번째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또 첫 월급을 받았을 때, 나는 성경에서 말한 것처럼 첫 수확을 모두 드리지 못했는데, 마침 중국 운남대학교에서 첫 달 강의료를 입금해 주었다.
이제 내 인생에서 다시는 첫 월급이라는 것은 없을 것 같았는데 다시 첫 월급을 받게 된 것이다.
그제야 난 첫 수확을 온전히 다 드리는 헌금을 처음으로 해 보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런 월급이 매월 계속 나올 줄로만 알았는데 운남대학교가 준 이 월급은 첫 월급이자 마지막 월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