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 증명해 보일 순 없으나 나는 내가 언제 감염되었는지 알 것 같다. 은의 길 7일 차이다.
<사프라>에서 <비야프랑카>까지 걸은 날. 갑작스럽게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행이 생겨서 평소보다 늦게 출발해서 늦게 도착한 날.
비야프랑카의 알베르게에서 샤워와 빨래를 마치고 모두들 시장해져서 물기가 덜 마른 몸으로 마트를 다녀왔다. 낮에 해가 떠 있을 때는 땀도 나는 날씨였지만 해가 지고 나면 급속도로 기온이 떨어졌다. 마트까지는 생각보다 멀었고 기온이 떨어지며 바람까지 불어서 후드를 뒤집어쓴 채 돌아오는 길에서 시장 봉지를 든 손가락이 시렸다. 알베르게에 돌아오고 나서 그제야 외부 일을 보고 돌아온 호스피탈레로와 일행들의 체크인을 대신해야 했는데 영어를 하지 않는 그와 나의 소통을 위해 자전거 순례자인 스페인 남자가 우리 사이에서 통역을 했다. 우리 일행이 한국인임을 알게 된 그들은 평소에 궁금했던 한국 관련 소식들을 물어봤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마스크를 하지 않거나 턱에만 걸친 그들과 한동안 알베르게 사무실에 머물렀다. 그와 접촉한 사람은 일행 중 내가 유일했다. 가끔씩 그렁그렁 가래 끓는 기침을 한 번씩 했던 호스피탈레로는 무척 친절해서 우리 일행만 따로 독립된 숙소와 주방을 쓰도록 배려해 주었고 추워하는 우리를 위해 추가 담요와 난방기를 아낌없이 나눠주었다.
양성 판정이 나온 뒤 나는 머릿속으로 자체 역학조사에 들어갔는데 확신할 순 없지만 그의 기침이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어쩌랴. 스페인 도착 이후 연속된 불면과 일행을 리드해야 하는 스트레스로 나의 면역력도 아마 이때 최저치였을 것이다.
다음날, 은의 길 8일 차.
비야프랑카에서 <또레메히아>까지 28km 구간을 걷는 일정인데 무거운 몸에 잠을 설친 나는 두드러지게 피곤해서 일행들로부터 쳐지게 되고 출발한 지 얼마 안 지나서는 사이가 꽤 멀리 떨어졌다. 휴식을 취하거나 점심을 먹을 때 앞서가던 일행들이 기다려주었는데 입맛이 없어서 대강 허기만 달래고 걸었다. 도착지가 가까워오자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과 가지치기하는 농부들 모습이 가끔씩 보였는데 이때 동료들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떨어진 상태였다. 너무 힘들어서 시에스타 휴식을 취하러 마을로 돌아가는 <안또니오>라는 농부의 차를 얻어 탔다. 앞서 가던 동료들을 만났고 그들 중 한 명이 내가 얻어 탄 차에 같이 타고 가기로 했다. 마을 도착 후 성당옆의 알베르게를 찾았는데 문이 잠겨 있었다. 영업을 하지 않은지 오래돼 보였다. 같이 온 동료와 흩어져서 마을 중심부로 돌아가 오스딸과 알베르게를 모두 들렀지만 전부 영업을 하지 않고 있었고 한 군데는 공사 중이었다. 구글맵에는 모두 현재 시간 영업 중으로 표기된 곳들이었다. 이때쯤 열이 나고 오한이 느껴지면서 몸살 증세가 느껴졌다. 나머지 일행들이 도착했지만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었다. 나와 차를 타고 온 일행이 혼자서 동분서주하며 마을 사람들에게 숙소를 알아보다가 <마놀로>라는 스페인 남자로부터 도움을 구했다. 다음 날 일정에 거치는 도시인 <메리다>까지 자신의 차로 우리를 태워다 주겠다는 것이다. 이때쯤 나는 거의 그로기 상태로 일행 중 한 명이 건네준 감기몸살 처방약을 먹고 병 걸린 닭처럼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친절한 마놀로가 태워준 덕분에 메리다 숙소에 도착한 나는 그대로 뻗어서 잠을 잤다. 처방약은 무척 세서 나는 내쳐 자다가 동료들이 포장해 온 저녁을 먹고 나서 같은 약을 한번 더 먹고 또 쓰러져 잤다. 간밤에 잠깐잠깐 잠이 깼는데 침대 시트와 베개 커버는 내가 흘린 땀으로 축축했다.
다음날 아침, 푹 자고 일어난 나는 완전히 컨디션을 회복했다. 내가 방에서 좀 더 쉴 수 있도록 일행들은 알아서 택시를 타고 또레메히아까지 가서 걸어오다가 점심 무렵 메리다 로마 다리 앞에서 만나 유적지를 같이 둘러보기로 했다. 오전 일과가 비어버린 나는 방에서 좀 더 쉴까 했지만 몸도 좋아졌고 방에만 있기가 심심해서 메리다 구도심으로 나왔다. 여유 있게 커피도 마시고 도시 곳곳에 무심하게 나뒹구는 로마 시대 유물들을 구경했다. 얼마뒤 일행들을 만났고 예정대로 박물관 구경도 하고 원형 극장과 수로를 둘러본 뒤 맛있는 점심도 먹었다.
그걸로 끝이다.
이후로 나는 아무런 증상이나 불편함 없이 일행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날부터 숙소 사정은 계속 꼬이기 시작했고 다른 마을의 숙소를 구하기 어려워서 묵고 있던 메리다 숙소를 하루 더 연장해야 했다. 아침저녁으로 택시를 타고 숙소와 트레킹 출발점, 마감지점을 이동했다. 조금만 벗어나면 로마 시절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을 것 같은 깡촌이 펼쳐지는데 이런 마을에서는 택시를 부르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노인들이 대부분인 동네 사람들을 여러 명 동원해야 간신히 내 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고 마을에는 택시가 없어서 주변 도시에서 택시를 호출해야 했다. 택시를 타고 가는 시간보다 전화를 대신해 줄 사람을 찾는 일, 우리가 원하는 바를 제대로 전달하는 일, 그 일을 해줄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찾는 일, 그 일이 제대로 전달됐는지 확인하는 일, 그리고 기다리는 일, 그리고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될 거라는 예상이 지치게 했다. 저녁 식사 후 숙소의 리셉션 아가씨에게 부탁해서 이날 이후 일정의 숙소 중 오픈한 곳을 알아봤는데… 모두 영업을 하지 않거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무작정 이렇게 걷기에는 한계가 왔다. 회의 끝에 마드리드로 돌아가서 일부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일부는 프랑스길을 걷기로 했다.
마드리드에서 프랑스길로 떠나는 일행을 보내고 한국으로 가는 편도 항공권을 다시 구입했다. 기존의 복편 티켓을 이용하려면 비슷한 금액의 페널티를 지불하고도 다음 주말까지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72시간 전 PCR검사서를 요구하던 한국 정부는 오미크론 감염률이 높아지자 해외입국자에게 48시간 전 검사서로 입국 자격을 강화했다. 묵고 있던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검사소가 있었고 월요일 밤검사를 받으면 화요일 저녁에 결과가 나온다고 했다. 한국에서 무료였던 PCR 검사 비용으로 60유로를 지불했다. 전에 한두 번 PCR 검사를 해본 경험이 있어서 나는 콧구멍을 움츠렸고 1분도 안 걸려서 검사는 끝이 났다. 다음날은 하루종일 마드리드 시내를 다니며 대통령궁과 마드리드 시장을 구경하고 레티로 공원을 걸었다. 해가 지자 결과가 곧 올 것이라는 생각에 갑자기 불안이 엄습했다. 사실 모르는 척했을 뿐 낮부터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여 나도 모르게 괜히 더 웃고 더 유쾌한 척을 하고 있었다.
8시가 되어도 결과가 오지 않아 마음이 초조해졌다. 계속 이메일 창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데 드디어 소식이 왔다. 동행과 같이 검사한 결과가 나의 메일로 한 번에 통지되었다.
POSITIVE
긍정이라는 뜻도 있는 이 단어가 한 사람을 순식간에 극도로 부정적으로 만들어 버렸다. 잠시 화장실에 들어간 동행을 위해서 먼저 내가 한 일은 94 마스크를 찾아 쓰고, 동료가 나오기 전에 마스크를 쓸 수 있도록 화장실 손잡이에 다른 94 마스크를 걸어두는 것이었다. 가방에서 마스크를 찾는 손이 떨렸고 비닐 포장을 뜯기가 어려워 여러 번 심호흡을 해야 했다. 다행히 동료는 NEGATIVE 가 나왔다.
무슨 일부터 해야 할지 앞이 캄캄했다. 한 번도 코로나 양성에 대한 시나리오는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