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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프로 Jan 31. 2024

둘러보니 나보다 연장자가 없네

나이를 먹으면서 경험하는 생경한 일들이 여럿인데 그중 하나는 불현듯 좌중을 둘러보니 내가 연장자 혹은 최고령자인 때가 심심치 않게 있다는 것이다. 


내가 연장자임을 자각한 순간의 기분은...서운한것도 아니고 서글픈 것도 아니고 화가 나는 건 당연히 아닌데 어쩐지 기분이 좋지는 않은, 하지만 그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고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다시 말해 내가 초래한 일 이고 내가 문제라는 낭패감이 엄습해 온다. shit....


그때 그런 기분을 요즘 친구들은 "쌔하다"라고 표현하는 것 같다. 


산에 오르는 것을 좋아한다. 

동네 뒷산도 좋지만 더 좋은 건 대피소가 있는 험준한 국립공원 정상이다. 내가 애용하는 곳은 이제는 사라진 설악산의 중청 대피소나 소청 대피소, 그리고 지리산의 장터목이나 벽소령 대피소이다. 

왜 산에 오르고 대피소에 머무는 것을 좋아하냐? 

그곳에서는 절대로 내가 연장자나 최고령자 그룹에 속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동네 뒷산이나 야트막한 시내 산에는 울긋불긋 입술까지 그려 넣고 올라온 아줌마들이 많지만 1000미터 넘어가는 고산에는 일단 아줌마들 숫자가 줄어들면서 중늙은이 이후 나이대의 할아범들이 눈에 띄게 많다. 

땅에서는 별로 주목도 못 받고 눈에 잘 띄지도 않던 남성 중장년들이 고봉준령에는 여기저기 자주 보이는 것이다. 

이들이 산행을 마치고 하루 쉬어가는 대피소 내 취사장에서 식사 준비를 하며 주위를 불러보면 60대는 청년이고 70대 이상들이 많은 편이다. 늙은이 여럿이 모여 고기를 굽고 소주잔을 기울이고 시간이 지나면 목청도 높아진다. 불콰해진 그들이 젊어 보이는 나를 향해 '어이!' 하거나 짧아진 말로 농을 걸어도 나는 웃으며 그들을 대한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빠져나간 취사장에서 어느덧 나는 최연소자인 것이다. 저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유럽에 가는 걸 즐긴다. 

미국이라고 별 차이는 없겠으나 그 나라는 젊어서 오랫동안 살아본 경험으로 말이 통하고 풍속을 알고 있으니 별로 신비롭지가 않다.  고풍스러운 유럽 여행에서 내가 즐거운 또 하나의 이유는 내 연령의 15년쯤, 심지어는 20년을 깎아주는 그들의 넉넉하고 후한 '나이 인심' 때문이다. 동양 사람이 서양인에 비해 젊어 보인다는 것은 그들도 모르는 것 같지는 않은데 어쨌든 길에서, 식당에서 만난 그들은 나를 동양에서 온 젊은 아저씨, 혹은 노총각으로 까지도 봐주니 유럽에만 가면 안 하던 피부 관리에 마스크팩까지도 챙기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유럽에 갔다고 내가 3, 40대가 되는 것도 아닌데 인사치레로 젊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생전 처음 나를 본 사람들이 진심으로 나를 젊게 봐준다는 사실이 나를 기분 좋게 만들고, 또 젊어지려고 노력하게 만든다. 달리기가 취미인 나는 유럽에서도 달리기를 해 봤는데 한국에서보다 더 빠르고 더 오래 뛴다. 유럽은 정말로 나를 젊은이로 만드는 것이다. 


달리기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내가 좋아하는 취미 중 하나인 달리기는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운동이지만 잘하고 싶다면 동네마다 있는 달리기 클럽에 가입하면 많은 도움이 된다. 나도 처음엔 혼자 하다가 동네 클럽에 가입하고 함께 운동하기 시작했는데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주중에는 퇴근 시간 이후로 모이는 시간을 정해서 호수공원이나 근처 강변을 달리는 코스로 2, 30명쯤의 회원들과 함께 달리는 프로그램과 주말 아침 달리기를 한다. 모임을 이끄는 코치를 자청하는 이들은 아마추어치고는 상당한 기량을 가진 편이어서 이런저런 대회에 나가면 수상권 내에 드는 실력자들이었다. 달리기 클럽에서 함께 운동하면서 마라톤 대회 정보도 얻고 같이 훈련하는 건 즐거운 일인데 어쩐지 이들과 친해지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3, 40대가 주축인 달리기 클럽에서 나는 나이가 좀 많은 편이긴 했으나 나보다 연장자도 몇 명은 있었다. 이들 연장자들과 젊은 회원들은 스스럼없고 친하게 보였는데 가만히 지켜보니 이 연장자들은 이미 달리기 클럽에서 오랫동안 활동을 해왔고 달리기 실력도 꽤 좋은 편이어서 젊은이들과 '달리기 대화'가 된다는 점이 나와 달랐다.  

산에서 내가 젊은이 대우를 받고 산노인들과도 스스럼없이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산을 타는 데에 익숙한 점도 한 역할을 한 것 같았다. 산에서는 산 잘 타는 놈이 '갑'이고 달리기 클럽에서는 나이가 어찌 됐던 달리기를 잘하는 놈이 최고인 것이다. 나는 달리기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속도도 느렸고 풀 코스 경험도 아직 없는 신참이라는 점이 핸디캡이 되었다. 게다가 나이도 적지 않으니 젊고 빠른 회원들의 눈에는 내가 별로 매력적이지 못한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도 저희들끼리는 형, 동생 하면서 안부도 주고받고 친근함을 보이는데 적지않은 나이와 달리기 약체라는 두 가지 치명적 조건을 달고 있는 나로서는 그런 대화에 끼어드는 것도 쉽지 않고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일도 별로 없게 되었다는 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다. 


나이 먹으면 별것 아닌 일에 서럽다. 나하고 안 놀아주고 말을 안 걸어주는 그룹에 있으면 문제점을 파악하고 개선점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달리기 실력이라면 열심히 개인적인 노력을 해서 기량을 향상하고 그들이 말을 걸어오지 않으면 내가 먼저 흰소리도 하면서 스스럼 없어지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 내가 즐겁고 환영받는 그룹을 만들고 그들과 즐기면 그들처럼 젊게살수 있을 것이다. 


산에 가고 유럽에 가는 일은 내가 이미 확보해 둔 젊어지고 즐거워지는 취미이니 주기적으로 다니며 활력을 찾는 일상으로 만들 것이다. 달리기 클럽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기존의 '어려운 아저씨'의 모습에서 '열심히 노력하는 형'으로 변모한다면 나는 정말로 젊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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