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환교수 사례2편
방문학자 비자를 취득하여 교환교수로 일 년간 체류할 국가와 대학을 알아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래서 아마 많은 교수들이 알아보다가 중도 포기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 같았다.
이 일이 쉽지 않은 이유는 상대 학교에서 평소의 자기 일을 하면서 굳이 나와 내 가족이 비자를 받고 입국하여 체류하는 동안의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뒤치다꺼리를 맡아줄 사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에서는 이런 일을 대외협력처에서 담당하는데 외국 대학의 경우 그런 부서가 있는 학교도 있고 아닌 경우는 방문하려는 학과의 조교나 교수가 이런 일을 처리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내 기호와는 별개로 미국, 호주, 중국의 대학이 내가 교환교수로 가려는 최종 후보 대학으로 추려졌고 그중에서 중국의 윈난예술대학이 내가 한번 방문한 경험도 있고 학장과도 친분을 터 논 사이라 일이 가장 매끄럽게 진행됐다. 아이들과 아내에게 중국과 우리가 가서 살게 될 쿤밍이라는 도시에 대해 설명하고 동의를 구했는데 다행히 아무도 반대하지 않아서 최종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중국에 도착 후 아파트를 구하고 아이들 학교를 정하고 거주 비자를 받는 문제는 나의 다른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내 신상이 정리된 후 학교를 방문해서 내가 할 일이나 나에게 기대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 확인할 겸 윈난대 교수들과 회의를 가졌다. 윈난성의 대학들은 단과대학이 많았는데 수도 많았고 규모도 컸는데 이렇게 여기저기 도시 곳곳에 흩어져 있던 대학들을 몇 년 전에 모조리, 한꺼번에 쿤밍 도심에서 전철로 한 시간쯤 떨어진 신도시 '대학성'으로 이전시켰다.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같은 캠퍼스 타운을 만든 것이다. 윈난예술대 역시 대학성의 한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예술 단과대학이어서 그런지 음대, 미대, 무용대 등도 같이 있었고 나외에도 외국인 교수들도 몇몇 눈에 띄었다.
윈난예술대에서는 내가 도착해서부터 나를 도와줄 통역 선생님 한 분을 붙여주었는데 예전에 윈난대를 방문했을 때도 나를 도와준 적이 있는 조선족 출신 '이선생'이었다. 이선생님은 그 후로도 내가 학교에 올 때마다 내 옆에 붙어다니면서 회의나 수업에서 내가 불편하지 않도록 통역을 도맡아 주었는데 다른 직장을 갖고 있는 이선생님은 나를 도와주는 일수를 합쳐서 월마다 통역수당을 받는다고 했다. 30대 초반 이선생님은 내가 사는 쿤밍에 살고 있어서 학교 일 말고도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달려와주어서 우리 가족의 중국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참석한 학과회의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은 그때가 아직 개강을 안 했을 거라고 생각한 8월 말이었는데 윈난의 대학들은 이미 개강을 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시간표가 다 짜여있었는데 학과회의에서는 내가 맡을 수업을 위해서 한 강사 선생이 하고 있던 수업을 내 수업으로 바꾸어 줄 테니 나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한국과 한국 영화에 관한 수업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사실 나는 조금 난감했다.
교환교수는 대개 정규 수업을 하지 않고 학기 초나 말쯤에 전체 학생이나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특강을 몇 차례 하는 식으로 학기를 보낸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구년이 달콤한 것은 수업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는데 중국의 대학에서 수업을 하는 쪽으로 정해진 것이다.
나중에 중국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는 대학원 후배 채교수와 통화를 했는데 채교수는 나에게 적극적으로 수업을 해보라고 권유했다. 한국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이고 학생들도 열심이어서 새롭고 신선한 기분이 들 것이라고 했다. 일주일에 한 번 세 시간 강의이니 큰 부담은 아니어서 한국 영화사와 최근의 한국영화감독 연구를 중심으로 수업방향을 정하고 회의를 마쳤다.
그동안 나와 내 가족의 비자수속을 도와준 대외협력 직원과 윈난예술대학과 근로계약에 도장도 찍고 강의료를 수령할 내 중국은행 계좌도 제출하면서 공식적인 중국 대학의 교수 신분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와 이선생과 수업을 하러 가기 전 날 만나서 회의를 하기로 시간을 정했다.
영화 관련 지식이 없는 이선생이 내 강의를 제대로 통역하려면 기초적인 영화 용어들과 매주 내 강의 주제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을 해두고 있어야 수업에서 내 말을 제대로 통역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수업을 3주쯤 한 9월 중순 경 갑자기 학교에서 이선생을 통해서 연락이 왔다. 자세한 설명은 없이 '당'에서 학교에 '감사'를 나왔다고 했다. 여기서 당이란 '공산당'을 말하는 것이고 감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감사와 비슷한, 이것저것 털어내서 문젯거리가 없는지 보는 것이라고, 결과도 나오기 전에 무척 어려운 일을 닥친 사람들처럼 난색을 표하고 있었다. 그런 감사에 대비해 윈난예술대학은 학기 초에 당에 제출한 시간표대로 수업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강사의 수업을 대신해서 내가 맡았던 수업은 원래대로 복구시켜야 하고 그래서 나는 앞으로 당분간 학교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수업을 하지 말라는 거네... 수업 준비를 하고 있던 나는 떨떠름했지만 그들의 말을 따르는 것 말고는 별다른 선택지도 없었다.
몇 차례 중국 대학에서 수업을 한 소감은 일전에 후배교수가 나에게 전해준 것처럼 정말로 색다른 경험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내 전공 학생들의 워크숍 지도를 중심으로 수업을 했는데 그래서 한 반 인원은 많을 때가 스무 명 정도였고 열대여섯 명쯤이 일반적인 경우였다.
그런데 첫 수업날!
내 수업이 있는 강의실 복도에는 오고 가는 학생들로 분주했다가 내가 강의실로 들어서자 그 복도에 있던 학생들이 모두 강의실로 밀려들어왔다. 강의실은 수용인원이 100명은 훨씬 넘어 보였는데 수업 뒤편에는 학과회의에서 인사를 나눈 강사 선생들과 대학원생들도 서 있었고 모두들 내가 입을 열기 전까지 조용히 숨죽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테이블 한쪽에는 나를 위해서 생수 한 병과 따뜻한 찻물이 담긴 주전자와 찻잔, 차가 서너 종류 준비되어 있었는데 물을 마시려 테이블로 움직이자 강의실에 있던 수백 개의 눈동자가 나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환영해요, 교수님. 알려줘요, 교수님. 말해 주세요, 한국 영화에 대해서.
20년 가까이 교수로 수업을 하는 동안 처음 대해보는 색다른 열정과 호응과 호기심의 학생들이었다.
한국 학생들이 수업에서 보이는 자연스러운 모습과는 좀 달랐지만 이들은 한국의 대학에서 온 나에게 기대하는 바가 몹시 크다는 것이 온몸으로 체감되었다.
아, 이래서 채교수는 나보고 중국의 대학에서 수업을 해보라고 한 거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