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는 돈 안 들어
달리기를 시작한 이래로 의도하지 않은 거짓말을 했다.
나에게 달리기에 관해 거짓말을 들은 사람은 주로 내 아내와 아이들이지만 나와 같은 달리기 클럽에 있는 이들에게도 했고 형제들과 친척들에게도 한 것 같다. 다시 곰곰 생각해 보니 내가 달리는걸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달리기와 달리기에 관한 거짓말을 한 것 같다. 그런데 정말로 속일 작정으로 의도하지는 않은 말들이었다.
첫 번째, 그리고 가장 큰 거짓말이지 않을까 싶은데, 달리기는 별로 돈이 들지 않는다고 한 말이다.
달리기를 하기 전 나의 취미는 등산과 트레킹이었다. 당일치기용 20리터 급 배낭부터 원정 산행용 100리터 배낭까지 다양한 크기의 배낭과 그 배낭을 가득 채우는 등산용품으로 이제까지 쓴 돈이 적지 않았다. 그런 장비를 싸 짊어지고 광교산이나 관악산, 북한산도 가지만 내 최애산인 설악산과 지리산도 자주 가고 한 해 걸러 한 번씩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오거나 히말라야를 다녀오는 편이니 원정 비용도 많이 든다.
내가 틈틈이 심사 알바를 하고 초과 강의료와 원고료, 인세 등등을 모은 돈은 대부분 이런 용처로 사라진다.
그래서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나는 아내에게 큰 소리를 쳤다.
'여보, 빤스랑 난닝구만 있으면 돼! 러닝화는 애들 운동화 신고 뛰면 되지.'
이때까지만 해도 난 진심이었다.
그런데 알아보니, 그 빤스는 7만 원이고 난닝구는 5만 원, 더 기가 막힌 건 양말이 한 켤레에 9만 원이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비싼 빤스와 난닝구, 양말을 신고 뛴 것은 아니었지만 달리기에 진지해질수록 '전문 메이커' 물건은 '러너'라면 당연하게 챙겨야 할 필수 '장비'처럼 여겨졌고, 한번 지르고 나면 그다음부터 내가 지른 가격대 이하의 제품들은 뭔가 하자가 있는 물건으로 인식되었다.
여기서 막장급은 양말인데 목 짧은 독일산 'CEP' 양말은 5만 원이고, 종아리를 감싸는 축구선수 양말 같은 긴 것은 한 켤레에 무려 9만 원인데, 더 환장하겠는 것은 이 돈을 주고도 물건이 만날 품절이어서 목을 놓고 기다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색상의 양말 두 켤레를 18만 원에 주문을 하고 나서 기이했던 것은 아내가 나의 이 행각을 보고도 그냥 넘어가 주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궁금하지만 괜히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 일은 없어서 나도 스리슬쩍 잠자코 있는 중이다. 아마도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적절한 응대가 생각나지 않았을 것 같다.
러닝화는 처음에 10만 원대 '브룩스'로 시작했으나 클럽에 나갔더니 좀 뛴다는 사람들은 죄다 나이키 '알파플라이'나 '베이퍼플라이'를 신고 있었다. (이 생소한 이름을 기억하는 데에 꽤 오래 걸렸다) 알파플라이 1이 나이키 공홈에 열리는 시간을 미리 알려줘서 나도 수많은 다른 한국인 러너들과 휴대폰에 빨려 들어갈 듯이 노려보면서 가까스로 주문을 했는데 내가 결재를 마치자마자 곧 알파플라이는 대부분 매진이 돼서 아주 작은 사이즈와 어마어마하게 큰 사이즈가 아니고서는 구할 수 없는 물건이 되었다. 나처럼 럭키하게 주문운이 따르지 않은 사람들은 실의에 빠진 채 곧바로 당근마켓으로 몰려가 되팔이들이 5만 원, 10만 원 웃돈을 얹어서 파는 알파플라이를 구해서 신었다. 정신을 차리고 내가 결재한 내용을 보니 아프리카의 마라톤 선수의 사인이 휘갈겨진 이 러닝화의 가격이 33만 원이었다. 해외에 살고있는 친구들에게 그곳에서 이 신발을 구할수 있는지 물었는데 놀랍게도 달리기를 하지 않는 그들도 이 물건을 알고 있었다. 미국에서도 일본에서도 구할수가 없는 물건이었고 심지어 가격도 한국보다 더 비싸기도 했다. 지구에서 구하기 힘든 물건을 나는 단박에 구한 것이다. 30만원이 넘는 돈을 운동화에 쓰고 나서 이토록 뿌듯했던 적은 처음이었다.
이것 말고도 달리기를 하려면 바람막이, 모자, 바이저, 헤드밴드, 스포츠 선글라스, 부상방지용 스포츠 테이프, 동계용 조거 팬츠, 조끼, 버프, 러닝 베스트, 장갑 등이 있어야 하고 이것들 역시 하나같이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대에 늘 품귀현상을 빚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조깅화를 포함해서 모든 용품들은 다양한 제조사의 물건들로 여러 세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새로운 조깅화가 나오면 브랜드별로 모델별로 수집하듯 사모으는 여성 회원에게 물었다.
'이제껏 그렇게 러닝화를 많이 샀는데 또 사요?'
'러닝화 회사마다, 모델마다 발을 자극하고 보호해 주는 부위가 달라요. 이렇게 번갈아 신으면서 나에게 맞는 신발을 찾아가는 거예요.'
오, 매우 설득력 있는 설명이었다. 나는 그녀의 대답을 그대로 인용해서 내가 또 러닝화를 사야 하는 이유를 아내에게 설명하고 있는 중이다.
또 하나의 추가 비용은 대회 참가비용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라톤 사랑은 가열차게 달아올라서 전국 각지에서 매달, 매주 마라톤 대회가 열리고 있다. 그 대회에 참가하려면 일찌감치 참가 신청을 해야 하는데 적게는 20만 원에서 많게는 50만 원까지도 한다는 미국과 유럽 대회에 비하면 가격이 참으로 '혜자'스럽다. 국내의 10km나 하프 마라톤의 경우는 대개 4-5만 원 선이고 풀코스는 7-8만 원쯤, 비싼 대회가 10만 원 정도이다.
나는 최근에 5주 동안 다섯 개의 10km와 하프코스 대회에 참가해 봤는데 대회 참가비를 모두 합쳐보니 20만 원이 넘었다. 강릉에서 열린 노스페이스 대회는 왕복 교통비와 식대가 추가로 필요했고 전철 타고 간 대회도 약간의 이동 비용이 필요했다.
이것 말고도 쓴 비용이 있는데 바로 파워젤, 에너지부스터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스포츠 보충제이다. 달리기를 해보면 알겠지만 긴 거리를 달리려면 중간에 지치지 않도록 에너지 보충을 해줘야 한다. 여러 제조사에서 이런 용도의 고농도 보충제를 팔고 있는데 나는 일본제 아미노 바이탈만 먹는다. 이게 제일 내 몸에 잘 듣고, 그리고 제일 비싸다. 달리다가 한 번이라도 에너지 고갈로 어려움에 처해본 경험이 있다면 그다음부터는 두말 않고 가장 좋다는 걸 찾게 된다.
일본제품인 아미노 바이탈이 나에게 잘 맞아서 쿠팡에 주문해서 먹는데 주문하다 보니 이게 한 종류가 아니라 여러 종류가 있다. 운동 전에 먹는 거, 달릴 때 먹는 거, 달리고 나서 먹는 거... 한번 먹어보니 정말로 효과가 있는 듯하다. 한번 먹기 시작하면 못 끊는다. 안 먹으면 못 뛰는데 어떻게 끊는단 말인가. 넉넉하게 쟁여두지 않으면 불안하기 때문에 유통기한 맞춰가며 떨어뜨리지 않는다. 그래서 에너지 보충제로만 매달 10만 원 이상 쓴다.
난닝구에 빤스만 입고 달리기를 할 수도 있지만 오래 잘 달리려면 나는 내가 언급한 이런 물건들이 다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아마 글 써서 번 돈을 러닝화와 러닝 용품을 사는 데에 많이 썼을 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