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프로 Jun 24. 2024

빨간 차를 탈 용기 2

진짜로 탈 수 있겠어?

마뜩잖은 표정이지만 아내는 '내 돈 내가 쓸 권리'와 '이제까지 검소하게 살아온 보상'으로 호소하는 데에는 어쩔 수 없었나 보다. 그렇게 반강제의 동의를 얻어내고는 희희낙락 학교를 가는데 새삼스럽게 남들은 무슨 차를 타고 다니나 구경 좀 할 겸해서 모처럼 운전을 하고 가봤다. 그런데, 세상에 출근시간 경부고속도로 넓은 도로의 왕복차선에서 정말로 빨간색 차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와, 정말 한국에서 빨간 차를 타는 일은 특별한 것이로구나...


그렇게 학교에 도착해 보니 카마스터가 보내준 계약서가 와 있었다. 빨간색 차의 정식 이름은 '런웨이 레드 Runway Red'였다. 빨간 활주로! 색 이름도 멋지네...라고 생각했지만 스멀스멀 내 뇌리에 '정말로 빨간색 차를 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다시 전 날 검색해 본 빨간색 자동차의 이미지들을 꺼내 보았다. 강렬한 태양 아래 매끄러운 진홍색 자동차가 도발하듯 커다란 타이어를 드러내며 근육을 드러내고 있는 모습도 있고 육감적인 뒤태에 악센트를 주듯 붉은 라이트를 켠 채 다른 곳을 향해 무심한 듯 서있는 새침데기 빨강차도 있었다. 진한 립스틱을 진하게 덧바른 업소 여성처럼 퇴폐적인 자세로 양바퀴를 한쪽 방향으로 틀어놓은 육감적인 빨간 차도 보였다. 내가 이런 차를 타고 다닌다고? 스스로에게 묻는 나는 어제와는 다르게 자신감이 좀 기어들어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학기말이라 방학중에 해외에 나가는 학생들이 많았고 그중 몇은 교환학생을 떠나거나 유학을 준비 중인 이들도 있어서 추천서를 들고 찾아왔다. 그런데 그들 중 한 명의 여학생은 머리가 초록색이었다. 학생이 원하는 추천서를 만들어주고 난 뒤 지나가는 것처럼 물었다. 

"초록 머리칼이라 눈에 잘 띄어서 멀리서도 알아보기 쉽겠다"  

"그런 편이에요. 교수님이 그러셨잖아요, 예술가처럼 하고 다니라고."

그러자 내가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검은색 회색 옷만 입고 다니지 말고 컬러풀하고 예술쟁이처럼 티 내고 다니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학생들에게만 그러지 말고 나부터 당당하게 빨간색을 타고 다니자!'

빨간색 자동차에 자신이 없어지려다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퇴근을 했다.

거의 수중에 들어왔다 떠나버린 런웨이 레드 EV6

퇴근 차량으로 고속도로에서 가다 서다를 반복할 때쯤 카마스터가 전화를 해왔다. 

" 오전에 보내드린 차가 간발의 차이로 팔렸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카마스터가 나에게 보여준 차는 지난달에 만들어진 차로 이른바 '재고차'에 속하는 것이고 그래서 내게 할인을 300만 원이나 해줄 수 있던 것인데 지금 재고차 인기가 높아져서 계약서를 작성하려던 찰나에도 전국 어디선가 먼저 계약서를 작성하면 놓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카마스터는 현재 계약 가능한 차량을 대여섯 대 불러주었는데 등급과 옵션사양은 모두 비슷했으나 색깔이 흰색과 회색뿐이었다. 

"색깔 때문에 힘드시겠죠?"

카마스터는 빨강에 진심이었던 내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던지 내게 별 기대를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흰색 차는 할인 조건이 어떤가요?"

나는 마지못해 물어본다는 티를 내며 카마스터의 의견을 구했는데 그는 묻지도 않은 흰색차의 장점을 열거하며 신이 난듯한 목소리였다. 

"흰색이 인기가 많고 제작에도 비용이 더 들기 때문에 도색 비용이 추가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흰색차는 중고로 팔 때도 값을 높게 받습니다. 빨간색은 중고로 처리하기에도 힘들어요."

건성으로 듣는 척하고 확답을 주지 않고 통화를 마쳤지만 내가 여전히 자동차 구입의사가 있고 흰색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는 뉘앙스를 남겨두었다. 


일찍 퇴근한 아내는 아직도 내가 자동차 색깔 때문에 뾰로통해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조심스럽게 마주 앉아서 식사를 했다. 나는 내 의사는 아니지만 할 수 없이 결정되었다는 투로 차 이야기를 꺼냈다.   

"빨간 차는 팔렸대. 지금 재고가 흰색밖에 없다네."

아내가 쾌재를 부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아내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빨간색으로 사는 거 아니었어요?"

나는 우리가 사려는 차가 이미 만들어진 차여서 재고가 있으면 사고 없으면 새 차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상황이 갑자기 바뀌어버려서 가족 모두가 원하는 흰색으로라도 사야 할 것 같다고 마치 내가 가족들의 의사를 따르느라 내 욕구를 억누르고 양보하는 것처럼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좀 기다렸다가 빨간색 차가 나오면 사지 그래요, 급한 것도 아닌데?"

아내는 다시 내 희생은 가당찮다는 듯 여유 있게 받았지만 나는 한숨 쉬듯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역시 빨강차는 내 인생에선 가당찮은 일이었나 봐."


뒤늦게 저녁 식탁에 끼어 앉아 대화 끝자락만 들은 둘째가 제 엄마에게 물었다. 

"이제 흰색인 거예요?"

방으로 돌아와 책상에서 다시 자동차 홈페이지를 열어 전시해 둔 사진들을 보았다. 흰색 차를 보니 역시 무난하고 회색차는 점잖아 보였다. 빨간색을 선택하고 차를 바라볼 때의 두근거림이나 설렘은 없었지만 대신 편안하고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사진들을 넘기고 있는데 다시 '런웨이레드'가 눈에 들어왔다. 

아, 내 사랑 빨간차. 아무나 빨간 차를 탈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매일매일 저 선홍빛 차에 오르고 내린다고 생각해 보니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루 만에 내 마음에서 멀어져 간 빨간 차는 떠나간 첫사랑처럼 아련하고 애틋하게 보였다. 

나는 정말 빨간 차를 타볼 용기 조차도 없단 말인가?

매거진의 이전글 빨간 차를 탈 용기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