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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프로 Jun 24. 2024

빨간 차를 탈 용기 1

아내와 다툼 끝에 결국 빨간색 자동차를 주문했다

자동차를 새로 구입하는 문제는 아내와 아이들도 그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아내가 20년간의 경력 단절 끝에 재취업에 성공하게 되면서 한대 있던 승용차로 출근을 해야 해서 나는 자연스럽게 전철로 출퇴근을 하게 되었는데 내가 원하던 바였고 평소에도 거의 차를 갖고 다니지 않았으므로 바뀐 것은 없었다. 단지 내가 급하게 학교에 가야 하거나 많은 책을 갖고 오가야 할 일이 있을 때, 늦은 밤에 돌아와야 하거나 대중교통으로 가기 어려운 장소에서 모임이 있을 때 자동차가 없다면 꽤 불편할 것이라는 생각에 마침 눈에 들어온 중고차를 사게 되었다. 그렇게 구입한 중고차를 몇 달 타보니 앞으로 10년은 더 타야 할 자동차인데 가다가 서 버릴지도 모르는 불안한 중고차를 갖고 다니느니 이참에 새 차를 한대 구입하자는 마음이 든 것이다. 


전기차가 좋을 것 같았다. 

모두 친환경을 외치고, 뉴스에서는 플라스틱 빨대가 코에 걸린 바다 거북이 모습이 애처롭게 반복해서 나오고 있었다. 환경도 문제지만, 내가 학교에 출퇴근을 할 때 스쿨버스나 전철을 이용하는 이유 중 하나는 연료비와 고속도로 통행료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까지는 편도 50km가 넘는 거리여서 하루에 기름값으로 만오천 원 가까이 들었고 통행료는 왕복 6,800원이니 하루에 교통비로만 이만 원 이상 지출해야 했다. 그런데 전기차로 이동한다면 그 절반인 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가능하고 첨단 운전보조기능으로 막히는 고속도로에서도 피로도가 상당히 절감된다는 전기차 운전자들의 경험담은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이 즈음에 나는 현대 전기자동차 아이오닉에서 주관한 친환경 마라톤 "롱기스트런 10km"에 참가했는데 운 좋게도 아이오닉 시승 서비스에 당첨되었다. 마라톤 경기를 마치고 행사장인 여의도에서 내가 사는 집까지 전문기사가 운전해 주는 아이오닉을 타고 돌아오는 서비스였다. 내가 사는 곳까지의 거리는 학교까지의 거리와 비슷한 50km 안팎이었는데 도심구간과 고속도로가 섞인 한 시간 남짓 타는 동안 승차감이 매우 부드러웠고 그러면서도 필요시에는 순간적인 가속 능력을 보여줘서 놀라웠다. 무엇보다도 내연차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조용했던 운행 중 소음 등이 꽤나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다.


다 좋은데 아이오닉은 5나 6이나 너무 못생긴 것이 문제였다. 그러다가 기아자동차에서 나온 EV6를 보게 되었는데 날렵하게 생긴 모습이 시선을 끌었다. 

옳지, 바로 이거다. 

나는 즉시 기아자동차에 접속하여 시승 신청을 했다. 아이오닉이나 EV6나 비슷한 크기에 기술적 사양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아이오닉 승차 경험과 비슷했고 나는 망설이지 않고 구입을 결정했다. 카마스터가 건네준 카탈로그를 넘기며 색상을 고르다가 선뜻, 빨간색을 택했다. 카마스터는 의외라는 듯이 내게 되물었다. 

"빨간색은 원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일단 주문하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괜찮으시겠어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왔다. 

현대차 행사에서 시승했던 아이오닉

아내는 완강했다. 

빨간색이 이쁘다는 것은 알겠지만 50대 후반 남자가 타고 다닐 차로는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한두 달 타는 거라면 젊은 기분 내보고 좋겠지만 10년 탈 생각을 해보라고 점잖게 타일렀다. 

"내일 모래 70인 할아버지가 빨간색 차에서 내리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나도 지지 않았다. 

"멋있다고 하겠지"

나는 유튜브와 카탈로그에 나온 빨간색 EV6를 찾아서 보여주면서 머릿속에서 상상해 낸 새빨간 자동차를 떠올리지 말고 실제로 이렇게 이쁘게 나온 빨간 차를 보고 판단해 볼 것을 부탁했다. 

"보나 마나지."

아내는 내가 보여주는 장면들을 건성으로 보더니 아이들을 불렀다. 엄마에게 불려 온 아들들은 내가 펼쳐놓은 빨간색 자동차 카탈로그와 유튜브에서 보이는 빨간 모델의  EV6를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흰색이나 회색이 좋겠다며 자기들 방으로 사라져 버렸다. 

"봐요, 애들도 저러잖아요. 당신이 모는 빨강차에 날더러 타라고요? 난 안 타요."

아내와 아이들이 협공을 해대는데 아내가 전에 없이 강하게 주장하며 나오자 나는 주춤했다. 그날 밤 나는 밤새 유튜브에 올려진 빨간색 자동차를 찾아보며 어떻게 아내를 공략할까 고심했다. 


다음날은 주일이어서 아이들과 함께 교회에 가는데 평소처럼 모두 내차를 타고 갔다. 아내는 지나다니는 차들을 보며 계속 구시렁대었다. 

"도로를 보세요. 빨간 차가 어디 한 대나 있어요? 아무도 안타는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거예요. 젊은 나이라면 모를까 다 늙어서 무슨 주책이야."

성스러운 주일 예배에 가는 길에 아내의 말은 인정사정없이 상처에 뿌려대는 소금같이 따갑고 쓰라렸다. 참다못해 벌컥 성질을 내려했지만 벌써 교회에 도착한 뒤라 어쩔 수 없었다. 


예배 후, 전철역 근처 카페에서 대치동 학원행 분당선을 타야 하는 아이와 우리 부부는 커피와 간식을 먹었는데 나는 오전에 당한 '빨간 차 습격'에 조목조목 반박했다. 학원 가는 아이는 흥미롭게 내 주장을 지켜보다가 일어나서 가버렸고 계속 나를 말렸다가는 내가 심하게 삐질 것 같이 보이자 아내도 어느샌가 잠자코 내 주장을 듣기만 했다. 내가 빨간색 차를 사겠다는 이유는 여러 가지를 들었지만 결국 한 가지로 축약될 수 있었다. 인생에 꼭 한 번은 빨간색 차를 갖고 싶다는 것이다. 같은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1. 예쁘다. 

2. 사람들이 별로 안 타는 색깔이다. 그게 내 개성이란 걸 이해해 달라. 

3. 흰색, 회색, 갈색 등 타 본 색깔의 차를 또 타기는 싫다.

4. 이 차 이후론 운전을 할 생각이 없다. 빨간색 차로 운전 경력의 대미를 마무리하고 싶다. 

5. 검소하게 사는 내가 억대 스포츠 카를 사는 것도 아닌데 자동차 색깔 하나도 마음대로 고르지 못하는 건 부당하다. 


핏대 세우며 항의하듯 따지는 내게 침묵하는 것으로 아내는 마지못한 승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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