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챙김(Mindfulness) vs 정념(Proper mindfulness)
요즘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명상법 중 하나가 마음챙김입니다. 마음챙김이란 이름에서 이게 불교에서 유래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마음챙김은 불교용어인 정념(正念)에서 생겼습니다. 그런데 서양에서 ‘바른 마인드풀니스(Proper Mindfulness)’가 아니라 그냥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으로 번역했고, 그게 동양으로 역수입되어 ‘마음챙김’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전 세계는 이걸 마인드풀니스 즉 마음챙김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마음챙김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줍니다. 세계의 여러 학자와 명상가들은 마음챙김 명상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마음챙김에 대한 서적도 엄청나게 많이 있습니다. 어떤 언어이든 마음챙김의 방법, 원리, 이점 등을 쉽게 읽고 알아볼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 효과가 증명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 마음챙김 명상은 미국과 유럽에서도 아주 잘 알려져 있습니다. 출가자부터 일반인, 심리학자, 의사도 모두 마음챙김에 대한 이야길 합니다.
그리고 마음챙김이 보급되면서 명상이 더 잘 알려지고 대중화가 된 것은 좋은 일입니다. 명상을 한 번쯤 안 해본 사람이 주변에 거의 없을 정도로, 전 세계 사람이 명상에 대해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마음챙김 명상을 꽤 오랫동안 하면 결국 한계를 느끼게 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마음챙김 명상에서 감각적 쾌락이나 즐거움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명상을 배우러 가면 꽤 많은 이들이 이미 마음챙김을 오래 해보았다고 말할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5년 또는 10년 이상 해봤다고 말하고, 덕분에 명상에 대한 긍정적인 경험과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게다가 스트레스가 줄고, 기력이 증진되는 등 많은 혜택을 누렸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도 한결같이 어느 정도 효과를 경험한 후 더는 효과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다른류의 여러 마음챙김 명상도 해봤다고 말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무를 껴안는 명상을 하다가, 효과가 미미해지면, 설거지하면서 마음챙김도 해보고, 꽃향기에 집중하기도 해봅니다. 음식물을 씹으면서 마음챙김을 하고, 미소 짓는 명상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 모두가 겉모양만 좀 다르지 모두 감각적 쾌락이나 특정한 선정의 안락을 쫓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상에서의 진전이 너무 느려지거나 한곳에 정체하는 겁니다.
그것은 사실 진정한 불교식 명상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명상하는데 미소를 짓는다면 그건 명상의 기본과 반대입니다. 명상의 기본은 고요한 것인데, 입을 움직이고 미소를 지으면서 기분이 좋아지려고 하는 겁니다. 명상하거나 웃거나, 울거나, 코를 긁적거리거나, 좋은 기분 또는 긍정적인 느낌을 알아차리려고 노력한다면, 그건 명상의 기본과 반대입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여러분에게 유익하지 못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미 이런 명상법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보고 있다면 그것도 괜찮습니다. 선택은 여러분이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스타일의 명상을 하다가 한계를 느낀다면, 이제 여러분도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명상을 열심히 할 때는 좀 좋았다가, 멈추는 즉시 곧 예전으로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마음엔 여전히 잡념이 일어나고, 감정의 기복도 다스리기 어렵습니다. 그게 한계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동의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현재 하고 있는 명상으로 만족감을 느끼신다면 그냥 이 글을 무시하십시오. 하지만 그런 종류의 명상법에서 한계를 느끼고 있다면, 더는 발전할 수 없어서 돌파구를 찾고 있다면, 그것은 명상에서 편안하고 좋은 기분을 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방법이든 명상으로 기분도 좋아지고 마음도 편안해진다면 그것이 정체하고 있다는 증상이며 원인입니다.
우리가 하는 명상은 반대입니다. 우리는 기분 좋은 걸 부추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좋은 기분도 모두 일시적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기분이 여러분이 하고 있는 명상의 목표가 되면 안됩니다. 불교에서는 절대 그런 감각적인 걸 추구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런 잘못된 기반을 갖고 명상하면 초반엔 더 빨리 진전하는 것처럼 느끼고, 최고점을 찍겠지만, 그런 후 진전은 멈춥니다. 마음챙김을 수년간 해보고, 늘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면, 이것이 바로 그 이유입니다. 그런 기반을 갖고 명상을 20년을 해도, 대부분은 삼선(三禪)에서 정체하고, 그 이상 넘어가기 힘듭니다.
우리가 명상을 소개하면서 여러분에게 아프고 불편한 걸 참으라고 말하지만, 그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결가부좌 자세를 기본으로 명상을 가르치면, 가르치는 사람에게도 힘든 일이 늘 생깁니다. 처음부터 학생들이 많은 불평을 쏟아냅니다. 심지어 진전이 있고, 이게 좋은 방법이란 걸 알더라도, 결과가 좋다는 것을 경험하더라도, 일단 힘들고 괴로우면 누구나 불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불편한 걸 참으라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스승님이 가르쳐준 것처럼, 여러분도 단단하고 바른 기반을 세워서 멀리까지 갈 수 있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미국 위앙종의 기반입니다.
옛 중국 전통적 선(禪)의 훈련법은 더 어려웠습니다. 아마 한국도 그랬을 것입니다. 예전에 중국의 선당(선방)에 가면 모두 결가부좌로 앉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결가부좌로 앉으면 여러분도 똑같이 따라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거나 움직이면 누군가 와서 막대기로 때릴 겁니다. 게다가 설명도 안 해줬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렇게 하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요즘 사람들은 그런 걸 견디질 못하기 때문입니다. 서양 교육을 받은 요즘 사람은 그런 걸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앉아서 ‘내가 왜 여기 앉아서 시간 낭비하고 있지? 한 시간이나 있었는데 아무도 나에게 뭘 하면 되는지 말을 안 해주네’, ‘다리가 미친 듯이 아파. 다치는 건 아닐까?’, ‘이렇게 무리하면 내일 출근할 수 있을까?’ 이렇게 머릿속이 생각으로 가득 찹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불평과 고민을 편하게 말할 수 있도록 해주고, “괜찮아요. 다치지 않을거예요”라고 설명해줍니다. 언제나 쉽게 질문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줍니다. 조금만 더 오래 앉으라고 격려해줍니다. 원래 어려운 과정이니 포기하지 말라고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예를 들어 미국 위산사 법당엔 갓난아기가 기어 다니고, 바닥엔 장난감, 인형, 크레용, 아이패드 아무거나 다 있습니다. 나이, 종교, 문화 배경이 다른 이들이 명상할 수 있도록 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앉아서 졸면서 하든, TV를 보든 우리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훈련하는 방식이 유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미국식 위앙종 훈련 스타일입니다. 결과지향적입니다. 우리는 정체하는 것을 피하고, 계속 진전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진전은 여러분 스스로 알 수 있습니다. 더 좋은 사람이 됐는가? 더 자비로운가? 더 좋은 아버지인가? 더 좋은 어머니인가? 더 좋은 직원, 더 좋은 의사인가? 더 좋은 남편, 더 좋은 아내인가? 그것이 바로 진전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진정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속으로 ‘오 나 기분 좋아’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즐거움이란 우리가 삶에서 좋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진전은 여러분이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하고, 우리가 하는 걸 더 잘하게 해줍니다. 그것이 미국의 선(禪)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