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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안 XianAn 스님 Jan 17. 2024

최악의 적敵은 자기 자신입니다.

Who is your worst enemy? is you?

우리의 가장 큰 적은 누굴까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수행뿐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 결국 우리 앞길을 막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스스로 해탈도 가로막고 있는 겁니다. 그 어느 누구도 우리 해탈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직 우리 스스로 막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 해탈을 막고 있을까요?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어떤 문제든 부딪히면 본능적으로 어떻게 하나요? 그게 누구 잘못인지 파악하려고 노력합니다. 아주 골똘히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그러고는 자기 잘못을 보는 대신 다른 사람이나 상황을 탓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우리 모두 다른 이의 잘못을 찾아내고 이해하는데 능숙합니다. 하지만 남을 탓하는 그 순간, 우리의 초점은 진짜 문제인 자신으로부터 다른 사람을 탓하는 방향으로 이동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문제를 푸는데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습니다. 보통 타인의 문제는 잘 파악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문제는 모릅니다. 늘 잘못된 문제를 들여다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대부분 자신의 문제는 풀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주변에 쉬지 않고 타인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있을겁니다. 입만 열면 타인의 흉을 보거나, 문제가 발생하면 타인의 잘못이라 말하는 그런 사람의 마음은 혼란스러운 겁니다. 그러니 그런 말은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명료하게 파악할 수 없다면 거기엔 지혜가 없습니다.


스스로 해탈을 막는데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건 너무 일찍 그만두기 때문입니다. 중도에 포기하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포기한다는게 무슨 뜻인가요? 길을 가다가 중간에 그냥 멈추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장 큰 적은 자신입니다. 타인이 나보다 더 멀리 도달할 수 있고, 더 성공적이라면,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아니야. 너무나 힘들어. 이제 그만할래.' 또는 '과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등 합리적인 이유로 스스로 그만둬야 한다고 설득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아상(我相)의 발현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제일 잘 안다고 믿기 때문에, 누구도 나의 결정에 반대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 앞을 막습니다. 그만둘 수 있게 스스로에게 확신을 심습니다. 그래서 제일 큰 적은 자신입니다. 누구도 우릴 막을 수 없지만, 오직 스스로 멈춥니다. 그리고 이럴 때 우리의 아상은 제일 좋은 상태에 있습니다. 아상은 우리가 왜 멈춰야할지 꽤 설득력 있는 이유들을 내놓습니다. 그만두어야 할 타당한 이유는 어디서든, 얼마든지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해롭거나 말도 되는 일을 계속하라고 말하는 아닙니다. 하지만 수행으로 계속 진전하고, 성공하길 원하면 중간에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던 걸 멈추고 다음으로 넘어가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게 언제인가요? 한국의 수행자들은 너무 열심히 정진합니다. 심지어 지나치게 힘들수록 더 좋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수행의 큰 목표는 잊은 채 또는 스스로 정체하고 있다는 걸 알지도 모르고 무조건 열심히 합니다. 그래서 언제 그만두고 다음으로 넘어가야할지 알아야 하는 겁니다. 


부처님도 그만둔 적이 있는데, 여러분은 그걸 아시나요? 부처님은 출가했을 때, 당시 가장 뛰어난 영적 스승을 만나러 나섰습니다. 그때 가장 유명한 두 영적 스승을 찾아갔습니다. 부처님은 얼마 되지 않아서 이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건 이미 다 배웠고, 심지어 이들이 성취한 단계까지 도달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 스승들로부터 더는 배울 수 없다는 걸 알아차리게 됐습니다. 그런데도 부처님은 스승님과 1년을 더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스승에게서 배우고 수련한 것으로 해탈하기엔 부족하다는 것을 인지한 다음 나중에 그곳을 떠났습니다.


만일 여러분도 스승님으로부터 영적 수행을 위해서 배우고 있다면, 이 부분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이미 스승님의 모든 지침을 다 실행했는데, 가진 모든 노력과 에너지를 다 쏟아버렸는데도 큰 변화가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라면 다른 스승을 찾으러 가겠습니다. 스승에 대한 감사를 버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자라면 언제든 새로운 스승과 가르침을 찾아 떠나도 되는 겁니다. 바르고 지혜로운 선생님이라면 제자의 자유를 속박하지 않습니다. 좋은 스승도 각자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좋은 스승은 자신의 한계를 알기 때문에 제자를 구속하지 않습니다. 스승님이 더는 가르쳐줄 수 없다면 떠나야 합니다. 


스승님이 더는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까요? 여러분이 스승보다 더 높은 단계에 도달하면, 자연스럽게 스승보다 더 많이, 더 널리 헤아리고 이해한다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수행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더 낮은 단계에 있는 사람보다 더 멀리까지 볼 수 있고, 더 많이 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됩니다. 이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수행에서 진전이란 마치 고층빌딩에서 한 층씩 더 올라가는 것과 유사합니다. 올라갈수록 아래층보다 더 멀리까지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하더라도 올라갈수록 더 많은 것이 훨씬 명료해집니다. 둘째 스승보다 학생이 더 높은 단계에 도달하면, 스승은 학생에게 예전만큼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예로 선정의 단계가 낮은 사람의 말은 더 높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칠 만한 힘이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말을 해도 그 말엔 설득할만한 힘이 없어집니다. 이런 일이 생기기 때문에, 어떤 영적 지도자는 학생이 다른 데서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더 높고 심오한 가르침에 노출돼야만 스승을 뛰어넘을 기회가 생깁니다. 그렇기에 능력이 부족한 스승은 학생이 더 뛰어난 가르침에 노출되는 것을 반기지 않습니다. 훌륭한 스승이라면 제자가 자신을 뛰어넘는 것을 꺼리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스승이 더는 가르칠 수 없다는 징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좋은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 없을 때입니다. 여러분이 스승과 같은 단계에 도달하거나 더 높은 단계까지 도달하면, 스승은 여러분보다 더 좋은 방법이나 해결책을 내놓지 못합니다. 더 높은 단계에 도달할수록 더 지혜로운 해결방법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스승을 뛰어넘어도 홀로 수행하는 건 위험한 일입니다. 자기 자신을 믿기 시작하면 더 큰 발전은 어렵습니다. 많은 노력과 수고가 물거품이 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아라한이나 그 이상이 될 때까지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와 보호가 필요합니다. 아직 자기 자신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얻지 못했다면, 현명한 스승을 찾아보십시오. 더 널리 볼 수 있고, 더 큰 선정의 힘을 갖고 있으며, 지혜로운 스승을 찾으면, 여러분이 직면할 문제를 풀 수 있도록 도와주고, 바른 길을 보여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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