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is Venerable Master Hsüan Hua?
A Brief Account of the Life of the Venerable Master Hsüan Hua (1918-1995)
자료: 법계불교총회(法界佛教總會) 또는 Dharma Realm Buddhist Association
웹사이트 (영문)에서 발췌. www.drba.org
20세기 가장 탁월한 중국 선사 중 한 분인 선화 상인宣化 上人 (Xuanhua, 1918-1995)은 승가 개혁가였으며, 많은 수의 서양인들에게 불교를 가르친 첫 중국 선사이기도 하다.
One of the most eminent Chinese Buddhist masters of the twentieth century, the Venerable Master Hsuan Hua (Xuanhua, 1918-1995) was a monastic reformer and the first Chinese master to teach Buddhism to large numbers of Westerners.
그의 긴 경력 동안 그는 승가 전통의 으뜸, 도덕 교육의 중요한 역할, 전통적인 영적 수행과 정통 불경을 통한 불교인들 스스로 다져나가야 할 필요성 그리고 다른 종교들과 더불어 존경하고 이해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런 목표들을 이루기 위해 선화 상인은 부처님의 본래의 가르침의 주요 원칙들을 명확히 하는데 중점을 맞추고, 제대로 비구계, 비구니계를 받은 승가 커뮤니티를 설립 그리고 불교 경전을 영어와 다른 언어들로 정리하고 번역하는데 힘을 쏟았다. 또한 그는 학교, 종교 교육 프로그램, 학교 연구와 교육 프로그램들을 설립하는데도 집중하였다.
During his long career he emphasized the primacy of the monastic tradition, the essential role of moral education, the need for Buddhists to ground themselves in traditional spiritual practice and authentic scripture, and the importance of respect and understanding among religions. To attain these goals, he focused on clarifying the essential principles of the Buddha’s original teachings, on establishing a properly ordained monastic community, on organizing and supporting the translation of the Buddhist Canon into English and other languages, and on the establishment of schools, religious training programs, and programs of academic research and teaching.
1918년 중국 북동쪽 하일빈 남부 지방의 한 작은 마을의 소작농 가족에서 태어난 선화 상인은 여덟 형제 중 가장 막내였다. 그의 아버지의 성은 “바이”씨 였고, 어머니의 성은 “후”씨 였다. 어머니는 채식주의자 였고, 아미타불 염불 수행을 평생 하셨다. 선화 상인이 공식적으로 불교인이 된 것은 10대 중반이었고, 법명으로 앙치 (“평화와 자비”)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는 승려가 된 후, 토 륜 (왕생의 바퀴에서 해방된 사람)으로 알려졌다. 선화 상인을 위앙종 법맥을 법인(法印)함을 승인함에 따라, 허운 선사 (1840-1959)는 선화 상인에게 전법(傳法)명인 “선화宣化”를 수여하였다.
Born in 1918 into a peasant family in a small village south of Harbin, in northeast China, the Venerable Master was the youngest of eight children. His father's surname was Bai, and his mother's maiden name was Hu. His mother was a vegetarian, and throughout her life she held to the practice of reciting the name of the Buddha Amitabha. When the Venerable Master formally became a Buddhist, in his mid-teens, he was given the Dharma name Anci (“Peace and Compassion”), and after becoming a monk, he was also known as To Lun (Dulun -- “Liberator from the Wheel of Rebirth”). Upon granting him the Dharma-seal of the Weiyang (also pronounced Guiyang) Chan lineage, the Elder Chan Master Xuyun (1840-1959) bestowed upon him the Dharma-transmission name Hsüan Hua (Xuanhua — “Proclaim and Transform”).
선화 상인이 아직 어린이였을 때, 어머니를 본받아, 오직 채식만 하고, 부처님의 명호를 외웠다. 그는 11살에 땅에 누워있는 죽은 아이의 육신을 보고, 삶과 죽음에 대한 핵심적인 의미와 모든 현상은 일시적이는 것에 깨어났다. 그 후 선화 상인은 승려가 되어, 불교의 길을 따라 수행하려 굳게 결심하였다. 하지만 어머니가 죽기 전에는 출가하지 말라는 요청에 묵인하였다. 그는 12살에 진정한 영적 스승님을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나는데 부모님의 허락을 받았다.
When the Venerable Master was a child, he followed his mother's example, eating only vegetarian food and reciting the Buddha's name. When he was eleven years old, upon seeing a dead baby lying on the ground, he awakened to the fundamental significance of birth and death and the impermanence of all phenomena. He then resolved to become a monk and practice on the Buddhist Path, but he acquiesced to his mother’s request that he not do so until after her death. When he was twelve, he obtained his parents’ permission to travel extensively in search of a true spiritual teacher.
그는 15살에 처음으로 학교를 갔다. 그리고 16살에 글을 읽지 못하고 불교 가르침을 배우기를 원하는 동네 사람들을 위해 불경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는 성실할 뿐만 아니라 정확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유교 사서오경을 모두 외울 수 있었다. 그는 또한 동양의학, 음양오행설, 복술, 관상, 여러 큰 종교들의 서술들을 공부하였다. 그는 17세에 혼자 선생님으로 무료 학교를 설치하여, 빈곤 아동과 어른들을 30여 명을 가르쳤다.
At the age of fifteen, the Venerable Master went to school for the first time, and when he was sixteen, he started lecturing on the Buddhist Sutras to help these fellow villagers who were illiterate but who wanted to learn about the Buddha’s teachings. He was not only diligent and focused but possessed a photographic memory, and so he was able to memorize the Four Books and the Five Classics of the Confucian tradition. He had also studied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astrology, divination, physiognomy, and the scriptures of the great religions. When he was seventeen, he established a free school, in which, as the lone teacher, he taught some thirty impoverished children and adults.
그의 나이 18세에, 2년 반의 학교 교육만 받고, 죽을병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학교를 떠났습니다. 그의 나이 19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는 어머니 묘지 옆에 수수 줄기로 오두막에서 참선하며 삼년상을 하였다. 그동안 법화경을 읽고, 그는 깊은 깨달음을 경험하였다. 그 뒤에 앉아 참선하면서, 육조 혜능 스님(638–713 CE)의 비전이 있었다. 이 비전에서 혜능 스님이 그를 방문하여, 서양 세계로 불교를 가져와야 한다는 미션을 주었다.
At the age of eighteen, after only two and a half years of schooling, he left school to care for his terminally ill mother. He was nineteen when she died, and for three years he honored her memory by sitting in meditation beside her grave in a hut made of sorghum stalks. During this time, while reading the Lotus Sūtra, he experienced a deep awakening. Subsequently, while seated in meditation, he had a vision of the Sixth Chan Buddhist Patriarch Huineng (638–713 CE). In his vision, Master Huineng came to visit him and to give him the mission of bringing Buddhism to the Western world.
선화 상인은 삼년상을 마치고 챵쯔선사 (상지 常智 또는 ChangZhi)를 은사로 출가하여, “삼연사 三緣寺” 또는 “Three Conditions Monastery”에 사미승으로 들어갔다. 챵쯔선사는 이어서 그에게 “Jinding Pilu Chan lineage”의 법을 전해주었다. 그동안, 선화 상인은 참선뿐 아니라 불경 전통 공부와 주요 중국 불교 교리도 통달하였다.
At the end of his period of mourning, the Venerable Master took as his teacher Chan Buddhist Master Changzhi, and he entered Three Conditions Monastery as a novice monk. Chan Master Changzhi subsequently transmitted to him the Dharma of the Jinding Pilu Chan lineage. During this time, the Master devoted himself not only to meditation but also to the study of the Buddhist scriptural tradition and to the mastery of all the major schools of Chinese Buddhism.
챵바이 산맥에서 홀로 참선 수행한 후, 1946년 선화 상인은 중국 남쪽 지방으로 긴 여행을 시작했다. 1947년 중국 불교 명산의 하나인 푸퉈산(普陀山)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1948년 2,000 마일이 넘는 긴 여행을 하여, 선화 상인은 난화사(南華寺)에 도착하여, 중국에서 가장 널리 존경받는 깨달은 선사로 알려진 허운 화상 (虛雲 和尙)에게 절을 올렸다. 허운 선사로부터 그의 깨달음을 확인하는 전심을 받고, 그 후 위앙종 법맥을 잊는 더욱 공식적인 전수를 받았다.
After a period of solitary meditation in the Changbai Mountains, in 1946 the Master began the long journey to the south of China. In 1947, he received full ordination as a monk at the Buddhist holy mountain Putuoshan. In 1948, after over two thousand miles of travel, the Master arrived at Nanhua Monastery and bowed to Chan Master Xuyun, China’s most widely revered enlightened master. From him the Master received the mind-seal transmission as verification of his awakening, and later a more formal transmission of the Dharma of the Weiyang lineage of the Chan School.
1949년 선화 상인은 중국을 떠나 홍콩으로 가셨다. 여기서 그는 참선을 가르치고, 불경을 강설 그리고 불경 인쇄를 지원했다. 또한 그는 불 보살들의 이미지를 만드는데 지원하고, 중국 본토로부터 승려들의 망명을 도왔다. 그는 또한 서낙원사 (Western Bliss Garden Monastery), 불교 강당 (the Buddhist Lecture Hall), 자흥 선사 (Flourishing Compassion Monastery)를 짓고, 설립하였다.
In 1949 the Master left China for Hong Kong. There he taught meditation, lectured on the Buddhist Sūtras, and sponsored their printing. He also commissioned the making of images of Buddhas and Bodhisattvas, and he aided monastic refugees from mainland China. He also built Western Bliss Garden Monastery (Xi Le Yuan), established the Buddhist Lecture Hall (Fo Jiao Jiang Tang), and rebuilt and renovated Flourishing Compassion Monastery (Ci Xing Si).
1962년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살고 있는 홍콩 제자들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오셨다. 그리고 여기서 샌프란시스코 강당(Sanfanshi Fojiao Jiangtang)에서 설법하기 시작하셨다. 샌프란시스코의 그룹이 그 크기와 다양성이 커지면서, 그 이름도 바뀌게 되었다. 먼저 Sino-American Buddhist Association로 이름이 바뀌었고, 그 후, 1984년 법계불교총회(法界佛教總會) 또는 Dharma Realm Buddhist Association로 다시 이름을 바꿨다. 1970년 차이나타운으로 옮긴 선화 상인은 새로이 금산사를 샌프란시스코 미션 디스트릭에 설립하였다. 1975년 선화 상인은 엘에이에 첫 사찰인 금륜사를 설립하였고, 1976년 첫 본사인 만불성성을 캘리포니아 우키아 도시에 설립하였다.
In 1962, he traveled to the United States at the invitation of Hong Kong disciples who were then living in San Francisco Bay area, and he began lecturing at the San Francisco Buddhist Lecture Hall (Sanfanshi Fojiao Jiangtang), which had been previously established as a branch of the Hong Kong Buddhist Lecture Hall (Xianggang Fojiao Jiangtang). As the community at the Buddhist Lecture Hall in San Francisco grew, both in size and in diversity, the institution’s name was changed, first to the Sino-American Buddhist Association and then, in 1984, to the Dharma Realm Buddhist Association. In 1970 the Venerable Master moved from Chinatown to the newly established Gold Mountain Monastery (Jinshan Si) in the Mission District of San Francisco. In 1975 the Venerable Master established the organization’s first branch monastery – Gold Wheel Temple (Jinlun Si) in Los Angeles – and in 1976 he established a new headquarters as well, the City of Ten Thousand Buddhas (Wan Fo Sheng Cheng), in Ukiah, California.
1968년 여름, 대부분 대학생으로 이루어진 그룹을 집중적으로 수행 트레이닝을 시작하였다. 선화 상인은 이들 중 미국 여자 둘과 남자 셋을 사미승으로 받아들인 후 1969년 이들을 구족계를 대만으로 보내 대만의 승가 커뮤니티를 놀라게 하였다. 이들이 그때 당시 미국인으로는 최초로 비구계와 비구니계를 받은 승려들이었다. 그 이후, 선화 상인은 수백 명의 동양인과 서양인들을 비구계와 비구니계를 받도록 그들의 수행을 총괄하였다. 이들 중에는 선화 상인과 공부하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캘리포니아로 온 사람들을 포함한다. 지금 이들 승가 제자들은 선화 상인과 제자들이 설립한 미국, 캐나다, 호주 그리고 여러 아시아 국가들의 23개의 사찰과 선원에서 가르치고 지도한다.
In the summer of 1968, the Master began the intensive training of a group of Americans, most of them university students. In 1969, he astonished the monastic community of Taiwan by sending there, for complete ordination, two American women and three American men whom he had ordained as novices. They were the first Americans of that period to become fully ordained Buddhist monks and nuns. During subsequent years, the Venerable Master trained and oversaw the ordination of hundreds of people, both Asians and Westerners, from among those who came to California from every part of the world to study with him. These monastic disciples now teach in the twenty-three temples, monasteries and convents that the Venerable Master and his disciples founded in the United States, Canada, Australia, and several Asian countries.
선화 상인은 불교의 정법을 서양에 전파한다고 굳게 결심하였고, 중국에서 이미 널리 퍼진 타락한 수행이라 판단되는 것들은 명확히 거부하였다. 불건전한 문화에 결착된 미신적인 의식 절차와 수행자들에게 유용하고, 상식적인 진실하고, 불경에 기반을 둔 수행을 구별하여 제자들을 이끌었다.
The Venerable Master was determined to transmit to the West the correct teachings of Buddhism, and he categorically rejected what he considered to be corrupt practices that had become widespread in China. He guided his disciples in distinguishing between genuine, scripture-based practices that were useful and in accord with common sense, as opposed to ritual superstitions that were unwholesome cultural accretions.
이런 여러 많은 승가 수행 개혁 중, 그의 제자들은 모두 승가의 일원이라는 표시로써 승려 옷과 가사를 항상 갖추어 입도록 하였다. 선화 상인은 모든 승가의 출가인 제자들로 하여금 오후 불식하게 하였고, 본인도 이를 지켰다. 또한 채식이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승가의 제자들에게 부처님의 금욕 수행인 일일 일식과 장좌불와를 권장하였다. 그는 그의 승가 제자들로부터 엄격한 청정한 생활을 기대하였고, 일반인 제자들에게는 평신도 오계를 충실히 지키도록 권장하였다.
Among the many reforms in monastic practice that he instituted was his insistence that his monastic disciples accord with the ancient practice of wearing the monastic robe or precept-sash (kaṣāya) as a sign of membership in the monastic Sangha. He himself followed, and he required that his monastic disciples follow the prohibition against eating after noon. He considered a vegetarian diet to be of paramount importance. He encouraged his disciples among the Sangha to join him in following the Buddha's beneficial ascetic practices of eating only one meal a day and of never lying down. Of his monastic disciples he expected strict purity, and he encouraged his lay disciples to adhere to the five precepts of the Buddhist laity.
꼭 필요할 때는 영어로 이해하고 말할 수 있었지만, 선화 상인은 거의 모두 중국어로 설법하였다. 그의 목표는 모두 함께 도와 불경이 여러 언어로 번역되도록 서로 도와 그의 희망을 이룰 수 있도록 서양인 제자들에게 중국어를, 중국인 제자들은 영어를 배우도록 권장하였다. 현재까지 선화 상인이 설립한 the Buddhist Text Translation Society은 수 백 권의 번역물이 출판되었고, 이에는 선화 상인의 강설이 포함된 여러 주요 대승 불경도 포함되어 있다.
Although he understood English well and spoke it when necessary, the Master almost always lectured in Chinese. His aim was to encourage his Western disciples to learn Chinese and his Chinese disciples to learn English, so that together they could help to fulfill his wish that the Buddhist Canon be translated into other languages. So far, the Buddhist Text Translation Society, which he founded, has published well over a hundred volumes of translations, including several of the major Mahayana Sūtras with the Master’s commentaries.
교육자로서 선화 상인은 쉴 틈이 없었다. 만불성성에서, 그는 승가와 평신도들을 위한 공식적인 수행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초등학교,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 법계불교대학을 세웠다. 1968년부터 1990년 초까지 선화 상인은 직접 하루에 적어도 한 번씩 불경 강설을 했고, 널리 여행하며 여러 법문, 설법 투어를 하였다. 세계의 여러 불교인들의 요청에 따라, 선화 상인은 홍콩, 대만, 인도, 동남아, 유럽으로 대표단을 이끌어 불법을 펼쳤다. 그는 또한 미얀마, 태국, 말레이시아, 호주 및 남미에도 방문하였다. 그가 방문한 모든 곳에서 그의 존재는 많은 대중 수의 신앙인들을 따랐다. 그는 또한 많은 대학교와 학회에도 자주 초청되어 강설하였다.
As an educator, the Venerable Master was tireless. At the City of Ten Thousand Buddhas, he established formal training programs for monastics and for laity, elementary and secondary schools for boys and for girls, and Dharma Realm Buddhist University. From 1968 to the early 1990’s he himself gave lectures on Sūtras at least once a day, and he traveled extensively on speaking tours. Responding to requests from Buddhists around the world, the Venerable Master led delegations to Hong Kong, Taiwan, India, Southeast Asia, and Europe to propagate the Dharma. He also traveled to Burma, Thailand, Malaysia, Australia and South America. His presence drew a multitude of the faithful everywhere he went. He was also often invited to lecture at universities and academic conferences.
선화 상인은 여러 다른 불교 커뮤니티 사이에 다리들을 짓는 선구자였다. 오랜 세월 동안 나뉜 대승불교와 소승불교 사이를 치료한다는 소망으로, 그는 유명한 소승불교 승려들을 만불성성으로 초청하여, 양쪽 전통에서 함께 가지고 있는 비구계와 승가 계율의 전수의 의무를 나누게 하였다.
The Venerable Master was a pioneer in building bridges between different Buddhist communities. Wishing to heal the ancient divide between Mahayana Buddhism and Theravada Buddhism, he invited distinguished Theravada monks to the City of Ten Thousand Buddhas to share the duties of full ordination and transmission of the monastic precepts, which the two traditions hold in common.
그는 종교들 사이에 존경을 주장하고, 종파를 초월한 대화를 활발히 촉진했다. 그는 여러 종교 전통들의 공통성 중에서도 특히 바르고 자비로운 행동을 강조하였다. 1976년 그의 친구인 난징의 가톨릭 대주교이며 대만 가톨릭 푸런 대학 총장인 Paul Cardinal Yubin과 함께 세계 종교를 위한 기관에 대한 계획을 세워, 1994년 버클리에서 열매를 맺었다.
He also insisted on inter-religious respect and actively promoted interfaith dialogue. He stressed commonalities in religious traditions, above all their emphasis on proper and compassionate conduct. In 1976, together with his friend Paul Cardinal Yubin, who had been archbishop of Nanjing and who was the Chancellor of the Catholic Furen University in Taiwan, he made plans for an Institute for World Religions that came to fruition in Berkeley in 1994.
1990년 여러 유럽 국가들의 불교인들의 초청으로, 그 당시 안 좋은 건강 때문에 고된 여행으로 인해 생명이 단축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선화 상인은 유럽 달마 투어를 위한 큰 대표단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본인의 생명보다 불법을 더욱 중요하다고 간주했다. 이 여행 후, 그의 건강은 점차 악화되어, 매우 몸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1993년 대만으로 또 다른 주요 투어를 갔다.
In 1990, at the invitation of Buddhists in several European countries, the Venerable Master led a large delegation on a European Dharma tour, knowing full well that, because of his ill health at the time, the rigors of the trip would shorten his life. However, as always he considered the Dharma more important than his very life. After his return, his health gradually deteriorated, yet, while quite ill, he made another major tour, this time to Taiwan, in 1993.
로스앤젤레스에서 선화 상인은 1995년 6월 7일 77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났다. 그가 살아 있었을 때, 그는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았고, 명성, 부 또는 권력을 찾지 않았다. 그의 한 생각과 모든 행동은 모든 중생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마지막 지시사항으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떠난 후, 원하는 만큼 여러 날 동안, 7일 또는 49일 동안, 너희는 화엄경과 아미타 부처님의 명호를 외울 수 있다. 내 몸을 화장한 후, 남은 모든 것을 공기에 뿌려라. 나는 너희들이 이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원한다. 나를 위해 탑이나 기념비를 세우지 말아라. 내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이 왔으니, 내가 떠날 때,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이 세상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다. 공에서 내가 왔으니, 공으로 돌아간다.”
In Los Angeles, on June 7, 1995 at the age of 77, the Venerable Master left this world. When he was alive, he craved nothing, seeking neither fame nor wealth nor power. His every thought and every action were for the sake of bringing true happiness to all sentient beings. In his final instructions he said: “After I depart, you can recite the Avataṃsaka Sūtra and the name of the Buddha Amitābha for however many days you would like, perhaps seven days or forty-nine days. After cremating my body, scatter all my remains in the air. I do not want you to do anything else at all. Do not build me any pagodas or memorials. I came into the world without anything; when I depart, I still do not want anything, and I do not want to leave any traces in the world…. From emptiness I came; to emptiness I am return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