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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안 XianAn 스님 May 25. 2021

죽음과 49재 Death and 49 Days

영화 선사의 법문

참고자료: 2017년 9월 10일

https://youtu.be/u7ea2BHavGE


최근에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아는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오늘 보스코와 엔젤라의 아버님에게 애도를 표하고자 합니다. 보스코와 엔젤라는 남매입니다. 그들의 아버지가 오랫동안 아파서 병원에 입원한 상태로 있었습니다. 그런건 늘 아주 아주 안좋은 징조입니다. 몸에는 통증이 있는데 약에 취해 마비상태에 있죠. 그건 아주 안좋은 징조입니다. 미래 생에 좋은 표는 아닙니다. 그는 마침내 이틀전 뇌사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4개월간 그를 살려두기로 결정했습니다. 난 의학적으로 왜 그렇게 하는지 이유는 모릅니다. 아는 분 계세요? 뇌사상태인 사람을 살려두는 이유가 뭔가요? 

(청중 중 의사: 기적적으로 깨어날 수 있을지 그런 마음으로 합니다)

의사 선생님 말씀이 가족이 놓아버릴 수 없어서 그랬고, 과거에 이런걸 수년동안 그렇게 두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과거에 (다른 사람에게) 그런 기적이 일어난 적이 있기 때문에 가족들은 놓아버릴 수 없습니다. 이해할만 합니다. 근데 우리에게 문제는 이런 것입니다. 그들이 지금 49재를 시작하는게 나을지 4개월 기다렸다 시작하는게 좋은지 물었습니다. 뭘 하면 좋을까요?

내 대답은 바로 “왜 이런 일이 나한테 일어났지?”입니다. 하하하. 한번도 우리한테 이런 일이 일어난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릅니다. 4개월을 기다리면 49일이 지나가버립니다. 근데 지금 하면 그가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뭘 하면 좋을까요? 보스코는 괜찮다고 하는데 그 여동생은 안그렇습니다. 그녀는 놓아버릴 수 없다고 합니다. 청중이 중 어떤 분이 아버지가 고통 속에 있는데 어째서 그를 그냥 살게 둬서 계속 그 고통을 겪게 두냐고 묻습니다. 

불교의 관점에서 만약 뇌가 죽었다면(뇌사 상태)이고 의사들이 의학적으로 죽음이라고 선포할 수 있으며, 사실 불교에서는 이를 죽음으로 간주합니다. 불교에서 죽음은 어떻게 정의되는지 아시나요? 아시는분 안 계시나요? 청중에서 어떤 분이 따뜻함이 사라지면 이라고 말했는데, 그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병원에서 그의 체온을 인공적으로 유지시켜주기 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는 무엇인가요? 의식이 떠나는 것입니다. 불교의 관점에서 두번째 측면은 의식이 떠났을 때입니다. 

그래서 이 경우는 매우 어려운 일이예요. 우리가 뭘 해야 할지 잘 모릅니다. 사실 그의 몸이 아직 따뜻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진짜 죽었다고 하긴 어렵죠. (청중: 가족의 뜻을 따라야 하지 않을까요?) 네 가족의 뜻을 따라야하죠. 

내가 권하는 것은 놓아주는 것입니다. 그의 괴로움을 왜 질질 끕니까. 그의 인생이 괴로움으로 가득합니다. 특히 여러분이 나이가 들고 그렇게 아프면, 그가 다시 돌아온다 하여도 좋은 삶을 살기는 어렵습니다. 안 그런가요? 이제 놓아줄 시간이 된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권장사항입니다. 하지만 가족이 우리에게 기다려달라고 한다면 그렇게 해야합니다. 복에 끝이 오고 있는 겁니다. 질문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괴롭히는데는 참으로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건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두렵고, 죽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삶에 매달립니다. 불교, 특히 대승에는 다른 이들에게는 없는 죽음에 대한 아주 자세한 정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티벳은 최근 서양에서 많이 유명해졌는데, 그건 '사자의 서 (Book of death)' 덕분입니다. 하지만 그건 죽음에 대한 지식 중 아주 작은 부분입니다. 대승 불교에서 우리에게 아주 포괄적인 정보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미래에, 다음 생들에 더 잘 준비되어 있습니다. 

청중의 질문은 대승에서도 애도(grieving, 보통 죽은 자를 위해 슬픔에 젖는 것을 뜻함)하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이 있는가 입니다. 우리는 그냥 울지말라고 합니다. 놓아야 한다. 이런 질문을 하신게 흥미롭군요. 최근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수상 스키가 어린 여자아이 위로 지나가는 사고로 아이가 죽었는데, 여자 아이는 즉사했습니다. 수상 스키를 타던 사람이 여자 아이의 숙부였기 때문에 더욱 비극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양쪽 가족이 모두 매우 번뇌롭습니다. 특히 여자 아이가 귀여웠어요, 아주 아주 귀여웠습니다. 모두들 그 아이를 좋아했습니다. 저번 주 장례식동안 가족과 친척들만 참석하기로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북가주쪽에 그 장례식에 도착했을 때, 거기 100명 이상 있었습니다. 

아무튼 가족 내 모든 사람이 다 속상해 했습니다. 특히 그 아이의 부모는 아이와 시간을 보내지 않고 그냥 두었던 것에 대하여 자책했습니다. 이건 많은 가족들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아이와 시간을 보내기엔 너무 바쁘게 삽니다. 그냥 살기에도 바쁘죠. 

나이가 젊은 아이의 삼촌은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이제 그 사람은 남은 여생동안 후회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아이의 직계 가족은 그 삼촌에게 매우 분노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북가주로 올라가서 후회와 자책만 다루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한편에도 매우 속상해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이 있습니다. 이럴 때 불교에서는 뭘하나요? 무얼 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만큼 마음이 뒤집혔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게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작은 일을 하나 했습니다. 우리는 그 여자 아이의 49재의 속도를 높였습니다. 

나는 가족들에게 아이를 잃은 것에 대해서 유감이고, 내가 이 아이에 대해서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착한 아이였다고 말했습니다. 말을 아주 잘 듣는 아이였으니까요. 아이를 놓아줘야 하고, 감정적으로 아이에게 매달리면 안된다고 말해줬습니다. 감정적으로 아이에게 집착해서는 안된다고 말입니다. 애도는 감정적인 집착입니다.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너무 슬퍼하면 아이가 정토에 가지 않겠다고 결심할 수 있습니다. 근데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이 경우에는 가족에게 재앙이 왔지만 거기에 복이 숨어 있습니다. 이제 이 아이가 정토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그 말이 그 아이의 아버지의 아픔을 조금 달래준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는 한번도 불교를 믿어본적이 없고, 믿지 않습니다. 사실 그는 비구나 비구니들에 대해서 크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분노에 대해서 할 수 있는게 별로 없습니다. 어제 아이의 할머니가 나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스님에게 묻고 싶은게 한두가지 있는데, 첫째는 내가 불경을 염송할 때 아이를 집으로 데려올 수 있는가입니다. 나는 속으로 '세상에나 아직도 감정적으로 많이 집착하고 있군요'라고 생각하며, “네 데려가셔도 됩니다.”라고 답해줬습니다. 그녀가 말했습니다. “인도에서 온 라마승이 한 분 계신데, 최근 지진이 있었다고 합니다. 인도 또는 파키스탄 어떤 지역이었어요. 그래서 (사찰을) 다시 짓기 위해서 모금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집으로 초대해서 염송을 청해서 도움을 받을까 생각 중이었습니다. 그녀는 그래도 괜찮은지 나에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하죠. 난 그게 좋진 않지만 괜찮아요.” 여러분이 그걸 질투라고 부르던 뭐라고 부를 수도 있겠죠. 내가 만약 “안돼요”라고 말하면 분명히 질투겠죠. 그것밖에 설명이 안되니까요. 나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네 그래도 괜찮아요”라고 답해주고, 사실을 말해줬습니다. “아이에 대한 감정적으로 집착을 그만하세요. 당신은 아직도 감정적으로 너무 집착하고 있습니다. 내가 뭔가 이야기 해줘도 되나요? 내가 북가주에 갔을 때 모든 이들 앞에서 이 아이는 착한 아이라고 말한거 기억하나요? 내가 당신 손녀하고 이야기한 것에 대해서 말해주려고 합니다. 내가 손녀딸에게 정토에 가라고 하니까, 아이도 가는 것에 동의했어요. 착한 아이라서 말을 잘 들어요. 그렇게 아이가 정토에 가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난 원래 이런 말을 하지 않아요.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여러분이 내가 장난을 쳐서 돈을 뜯어내려고 한다고 생각할까봐 우려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아이는 이미 정토에 갔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집착하지 말아요.” 그녀는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해줬습니다. “내가 이미 말해줬잖아요? 재앙 한복판에서 큰 복이 있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아이에게 생길 수 있는 최상의 일이라는데 동의하지 않으시나요?” 그녀는 “네, 맞아요 맞아!”라고 답했어요. 그래서 내가 말하길 “그렇다면 이제 그 삼촌을 용서할 때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왜냐하면 그 삼촌에 그녀의 이런 큰 복에 손을 넣었으니까요”

이렇게 우리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이게 당신 질문에 긴 대답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애도하는 사람을 도울 방법이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과 미래의 생을 다루는 방법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하는지 안다면 여러분은 의미있고 좋은 인생을 사는데 도움이 됩니다. 

청중의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비극적인 죽음에 대해서 많이 듣는데, 우리가 무엇을 해야 좋은 죽음을 맞을 수 있을까요? 개인적으로 어떤 죽음이든 좋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이런 모든 것을 위해 열심히 했는데,..

나이 든 스님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지 아세요? 내 절에 무슨 일이 생길까. 사람들은 놓아버릴 수가 없습니다. 좋은 죽음이 있을까요? 잘 모르겠네요. 한번도 생각해본적이 없고, 지금은 생각하고 싶지 않군요. 사는 것에 대한 근심이 너무 많아요. 하하하. (청중에서 손을 든다) 구해주시려는 건가요? 농담이 아니길 바랍니다. 하하하. 

청중에서 한 분이 말하길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는 달리 사형선고란게 없다고 느낀답니다. 아침에 뒷마당에서 활짝 핀 꽃을 보고, 난 '사형선고'를 거부한다. 꽃이 지듯이 죽겠다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다른 청중 한분은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네요. (청중: 현실에 대한 부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엔 저 여자분은 사형선고가 다른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하려는 것 같습니다. '사형 선고'는 빚을 갚는(repayment) 한 형태입니다. 불교에서는 보통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자 한다면, 그건 여러분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라는 뜻입니다. 미래에 무슨 일이 생길지 궁금하다면 지금 뭘하고 있는지 보세요. 그것이 좋은 죽음(Good death)을 맞이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좋은 일 (선행)을 하십시오. 그러면 좋은 죽음을 맞을 수 있습니다. 악행을 피하십시오. 어떻게 좋은 죽음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당신의 질문에 대한 답은 데쓰 페널티(사형)은 피하고, 흠, 마치 축구 경기처럼 들리네요. 불교는 매우 간단합니다. 악을 행하지 않고, 선을 행하고, 또 뭐가 있을까요? 다른 이를 돕는 것입니다. 그러면 좋은 죽음을 가질 것입니다. 

청중의 질문은 사람들이 죽은 후 그 다음 어디로 가는가입니다. 불교에서 우리의 관심은 죽은 후 기독교 천상이든 초선천과 같은 가장 높은 천상이든 어떤 특정한 천상에 가는지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런 자세한 내용을 말해주는데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말해주고자 하는 것은 떨어지는 것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한번 떨어지면 아주 아주 오랜 기간동안 매우 심한 괴로움을 겪어야 합니다. 그곳에서 나오는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떨어진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그건 축생계(Animal Realm), 아귀계(Hungry Ghost Realm), 지옥계(Hells)로 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건 어마무시한 고통입니다. 

나중에 원하신다면 저 아래 있는 지옥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한 내용을 말해줄 수도 있습니다. 속이 튼튼한 분들에게 말해줄 수 있을겁니다. 저 아래 모든 종류의 지옥들이 저 아래 있습니다. 여러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고문은 다 저 아래 지옥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얼마나 잔인한지 상관없이 그런게 저 아래 다 있습니다. 여러분도 거기 갈 것입니다. 그게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말해주고자 하는 것은 떨어지는 것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이 이야기하지 않는 여러 징조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사람들이 죽을 때 겪는 아픔과 괴로움의 증세에 대해서 말입니다. 여러분이 죽을 때 평화롭게 죽는 것이 아주 좋은 조짐입니다. 죽을 때 아픔, 분노, 그렇게 죽으면 떨어지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이 죽을 때 있는 마음의 경계가 여러분 다음 생의 문을 열어줍니다. 그 상응하는 문이요. 내가 여러분을 위해 반복해서 말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마지막 생각, 마지막 숨 쉬기 전 그 생각, 다음에 어디로 갈 곳의 문을 열어줍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의 마지막 생각이 분노의 생각이라면, 지옥으로 갑니다. 그 여자 아이에게 일어난 일이 뭐냐면, 그 아이가 죽는 순간 너무 놀랐습니다.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아나요? 축생계요? 왜 그럴까요? 그녀의 두뇌가 놀라서 멍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stupefied). 

가족이 뭘 해야할지 정하는 동안 여자 아이는 축생계로 가는 중이였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우리가 이런걸 알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중요한 것은 일단 떨어지는 것을 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것은, 우리가 사찰에 가서 도움을 청하도록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이 사찰에 갔을 때 사찰에서 불경이나 부처님의 명호를 염송하면,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게 여러분을 올려줄 것입니다. 그들이 거기에 있는 이유입니다 (사찰이 있는 이유입니다). 모든 사찰은, 여러분이 절에 가시면, 여러분이 공손하게 “제발 돌아가신 분을 보살펴 주십시오”라고 청하고, 그들이 불경을 정직하게 염송하고, 떨어지는 것을 피할 수 있습니다. 베트남절에서 일요일에 2시간만 하더라도 낮은 법계로 떨어지는 것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게 그만큼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스스로 하려는 것은 마치 자기 몸을 스스로 수술하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다른 하나는, 출가자들을 포함한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할 내용인데, 49재라는게 있습니다. 실제로 이건 우리가 복을 지어서 죽은 사람이 정토로 갈 수 있는 때입니다. 정토는 이런 말법시대에 있을만한 가장 좋은 곳입니다. 대승에서만 49재가 있습니다. 티벳에서는 생불로 여기 다시 돌아오라고 권합니다. 우리는 그걸 권하지 않습니다. 멍청한 짓 마십시오. 여러분이 정토에 가는게 더 나읍니다. 정토에 가서 부처가 되는 것이 여기 돌아와서 윤회된 사람인 라마승이 되는 것보다 좋습니다. 여기서 왕생의 개념이 아주 나쁜 생각입니다. 난 이 발상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전혀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것이 잘못 이끌고 있다고 느낍니다. (청중에서 말을 했으나 들리지 않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몇 명은 되지만, 거의 대부분은 못합니다. 대부분은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그래서 그게 잘못 이끄는 법입니다. 

여러분이 충분히 괜찮으면 원하는대로 마음대로 갈 수 있지만, 난 당신을 걱정하는 겁니다. 이분, 저분, 저 뒤에 꼬마아이. 저 꼬마아이를 보십시오. 무력하지 않습니까? 법이 무엇을 위해 있습니까? 스스로를 도울 수 없는 (무력한 자들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죽고 무슨 일이 생기는지 아신다면, 진짜로 무슨 일이 생길지 안다면, 왕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겁니다. 나 같으면 이 세상으로 왕생을 권하지 않겠습니다. 나쁜 발상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통제가 안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권이 전혀 없습니다. 지금은 여러분이 따뜻하고, 편안하고, 돈도 있고,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지만, 죽은 후엔 여러분은 전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여러분의 업(카르마)만 쫓아와 여러분을 괴롭힐 것입니다. 여러분에겐 그것밖엔 없습니다. 업 (카르마)은 무엇이고, 업보는 무엇인가요? 그건 여러분이 다룰 수 없는 것임을 뜻합니다. 이걸 업보라고 부르는 이유는 여러분의 능력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도움이 필요합니다. 업보(rebribution)라 부르는 이유는 여러분이 이에 대해 무력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괴로워야만 합니다. 오직 몇 안되는 사람만 그걸 피하며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런 능력이 있기 때문에 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떨어지는게 매우 쉽습니다. 죽은 후에는 여러분의 업보가 찾아와 현재 여러분이 삶에서 느끼는 것보다도 훨씬 더 압도적일 것입니다. 지금도 여러분의 삶도 이미 업보 때문에 압도적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보십시오. 여러분이 죽고 나면 의존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무력해집니다. 여기 돌아와서 이런 일들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업보보다 더 빠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업보 앞에서 무력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업보가 오기 전에 도망가야 합니다. 또는 어떤 사람이 여러분이 그걸 다룰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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