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찬란 Aug 10. 2022

내시경

수면으로 할까요?

그를 침대 위에 눕혔다. 


-믿어줘,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반항하는 그의 입을 옆에 있던 거즈로 틀어막았다. 싸늘한 내 시선에 입을 다문 그의 눈에 체념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이미 그의 수족은 공업용 테이프로 단단히 묶여 있다. 나는 1주년 기념으로 그에게 내시경을 시술할 것이다.


-재워줄까, 아니면 그냥 할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고민이 되는 모양이다. 그가 무엇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입에 물린 거즈를 우악스럽게 잡아 빼자 입가에서부터 침이 늘어졌다. 불안한 표정을 보아하니 잠이 들긴 싫은 모양이다.


-그냥 할 거지?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과 간호사 8년 차인 나는 이제 웬만한 내시경 따윈 의사 없이 눈감고도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시술 측면에서는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고개를 어깨로 꺾어 입가에 흐르던 침을 닦아낸 그는 긴 한숨을 쉬었다. 이제야 현실을 받아들이는 모양이다. 나는 그를 모로 눕히고 쫄깃쫄깃한 수술용 장갑을 한껏 잡아당기며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자, 이제 그의 가슴에 품고 있는 진실이 무엇인지 확인할 차례다.


가락국수 면발보다 약간 굵은 내시경을 입 속에 집어넣자 그가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흉내 내지도 못할 기괴한 소리를 내며 트림도 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시경을 식도 깊숙이 집어넣었다. 내시경은 곧 위장에 도달했다. 모니터를 보니 위장 벽면 아래쪽, 십이지장 입구 부근에 작은 구멍이 하나 보였다. 이제 저곳에 내시경을 집어넣으면 그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있으리라.


약 5년 전 서툰 솜씨를 가진 의사가 십이지장의 입구인 줄 알고 내시경을 찔러 넣었을 때 우연히 발견된 이 공간을 의학계는 'ROT : Room Of Truth'라고 칭했는데 나는 이 이름이 참 맘에 들었다. 인간은 사춘기가 지나게 되면 이 ROT안에 엄지 손가락만 한 진주를 형성하게 되고 그 진주의 겉 표면에는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글자로 나타나게 된다. 우리는 내시경을 통해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힘을 주고 내시경을 밀어 넣자 5mm 직경의 렌즈가 달린 내시경의 머리 부분이 비밀스러운 그의 ROT로 파고들었다. 그가 꽉 막힌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진실이 노출되는 순간은 어쩜 이리도 고통스러운지.  순간 내가 시술했던 수많은 환자들의 ROT의 진주에서 발견되었던 글자들이 떠올랐다.


돈, 섹스, 욕망, 권력, 탈피, 자괴, 이기, 살인충동 등등


대개 열다섯 명에 한 번꼴로 '사랑'이라는 단어나 애인의, 혹은 자식의 이름이 나오곤 했다. 6.66%의 확률인 것이다. 바보 같다고 해야 할지, 순수하다고 해야 할지. 나는 악마의 숫자와 비슷한 그 확률에 당첨된 사람들을 보며 혀를 찼지만 한편으로는 부러움을 느꼈다. 이 사람들은 대개 그 순간을 기념하고 싶어 모니터 화면을 사진으로 출력했다. 그리고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마음속에 있는 그 사람에게 자신이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지 고백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진실된 이 고백은 100%의 확률로 성공했다.


우연히 열다섯 번째 나의 애인이자 열다섯 번째 내시경의 희생양이 된 이 남자는 무엇을 마음에 품고 있을까. 이 남자의 인생에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 나일까? 앞선 14명의 남자 모두 실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이 되면 소녀마냥 가슴이 떨린다.


글씨가 보인다.


김여진


내 이름이다. 하지만 아랫배 부근에서 뜨겁게 밀려오던 희열도 잠시, 이어진 세 개의 글자가 내 마음을 복잡하고 참담하게 만들었다.


이랑 자고 싶다


이런 미친놈.

하, 제기랄.




image source: https://unsplash.com/photos/RQgKM1h2agA

이전 06화 남희 언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