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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 Sep 23. 2020

그의 유품

그가 죽었다. 그리고 그는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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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죽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한동안 밤 9시 즈음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환상을 보았다. 환상이라기엔 망상에 가까웠다. 조금 지쳐있는 말투, 목소리, 눈빛, 손짓. 결혼 후 4년 동안이나 매일 보아왔던 그의 귀가 모습에 대한 망상은 송곳처럼 내 마음을 파내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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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구멍은 깊고 넓게 뚫어버린 한겨울 호수의 얼음낚시 구멍처럼 좀처럼 메워지지 않았다. 메워졌다 싶어 톡 하고 건드리면 이내 바사삭하고 다시 깨졌다. 마음 같아서는 구멍이 보이지 않게 낙엽이라도 덮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썩은 이파리 한 장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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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물건을 모두 버렸다. 6년의 연애, 4년의 결혼생활 동안 정말 너무나 많은 물건들이 내 주변 도처에 있었다. 그를 떠올릴만한 물건들을 모두 버린 뒤, 온전한 내 짐은 26인치 캐리어 하나에 들어갈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거짓말 같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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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년이 흘렀다.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철저히 외면하고 살았다. 그러나 나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가 자동차 사고로 죽었던 그날, 하릴없이 뒤지던 메일함에서 그의 흔적을 발견했다. 그가 나에게 보냈던 엑셀파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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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부탁해

첨부파일 : XXXX년 3분기 현황_170715.xlsx

메일 본문에는 아무 내용도 없다. 남은 회사 일을 집에서 마저 끝내야 한다고 나에게 보냈던 메일이다. 그가 회사 일을 집에서 했던 것은 단 한 번 있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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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 흔한 개인 메일 계정 하나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집에 컴퓨터는 내 작은 랩탑 하나뿐이었기에 그를 위해 첨부파일을 대신 받아주었다. 그는 일을 끝낸 뒤 파일을 직접 삭제했다. 나는 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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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울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파일을 열었다. 비밀번호는 없다. 14열과 513행으로 만들어진 공간에는 글자와 숫자들이 빼곡히 담겨있다. 꼼꼼한 그의 성격을 대변하듯 비어있는 셀이나 그 흔한 오류 메시지하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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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예의 그 무심한 눈빛과 건조한 손놀림이 불현듯 떠올랐다. 1년 동안 참았던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타닥타닥, 타이핑 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의 유품에 그가 있었다.

 



image source: https://unsplash.com/photos/nwWUBsW6ud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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