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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 Aug 10. 2022

기억상실

상실된 기억은 언젠간 돌아온다

밤새 어디를 돌아다녔는지 발에 흙이 잔뜩 묻어있다. 왼쪽 새끼발가락이 쓰라린 걸 보니 어딘가에 긁힌 것도 같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기억이 없다. 잠이 들기만 하면 다시 깨어날 때까지 무슨 일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깨어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다시 잠이 오기 시작하는 시간이 빨리 다가온다. 눈을 뜬 지 두 시간밖에 안됐지만 벌써 졸음이 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기억을 잃어버리기 시작한 건 13일 전이다. 


특별한 사건이 있던 건 아니다. 마치 꼭 일어나야 할 일인 양,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기억을 잃는다거나, 깨어있는 시간이 줄어든다거나, 금세 졸음이 온다거나, 발에 흙이 묻어있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내 주위 사람들이 하나둘 씩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문제다. 더욱 심각한 사실은 그것이 나 때문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주위 사람들이 사라지는 일과 내가 기억을 잃는 것을 연관시키기까지는 닷새라는 시간이 걸렸다. 


5일째 되던 날, 잠에서 깨어난 나는 여동생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았고 내 오른손에 붉은빛을 띠는 갈색 머리카락을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염색약 냄새 때문에 얼굴 앞에서 손을 휘휘 젓던 동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제야 나는 닷새 동안 동생을 포함하여 네 명의 사람들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 가장 친했던 친구 두 명, 여자 친구, 그리고 여동생. 


하루 이틀 정도 연락이 안 되는 일이 자주 있는 일은 아니어도 그리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그저 바쁘겠거니,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묘하게도 기억을 잃기 시작한 후로 지금까지 흘러온 날짜와 사라진 사람의 수가 일치했다. 사라진 그들을 찾으러 나서기도 전에 나는 또다시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여지없이 또 한 명이 사라져 있었다.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아마, 아니 확실하게, 내가 사라지게 만들고 있다. 이제야 확신이 든다. 하지만 의문이 생긴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나의 기억'은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을까. 그리고 왜 그들을 사라지게 하는 걸까.


13일 째인 오늘, 사라진 사람들은 열두 명이다. 


그리고 130일째.

나는 공허함과 동시에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낀다. 혼자라는 사실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깨어있는 시간이 짧아지니 무엇인가를 고민하거나 걱정할 시간조차 없다. 이제 내게 하루는 13분이 되었다. 더 이상 줄어들지도, 늘어나지도 않는다. 눈을 뜨고 나서 정확히 13분이 지나면 잠이 들어 버린다. 집을 나갈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집에는 기척 하나 없다. 아니, 집뿐만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작은 아파트 전체가 조용하다. 사람들이 사라져 간다는 사실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처음에는 누가 사라지는지 꼼꼼히 짚어보기도 했다. 스물두어 명쯤 세어보았던 것 같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그것조차 귀찮아졌다. 요즘은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도 사라지고 있는 듯하다.


1년, 그리고 12일째.

내게 주어진 시간이 13분밖에 없기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며칠이나 지나갔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이젠 이 일이 왜 시작되었는지조차 궁금하지 않다. 오랜만에 TV를 켜보았는데 아무런 방송도 나오지 않는다. 어떤 연예인도, 어떤 정치인도, 어떤 범죄자도, 어떤 스포츠 스타도 나오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파를 억지로 출력해 놓은 듯한 노이즈만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5년, 그리고 8일째.

사람들이 얼마나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전과 다르게 세상이 참 조용해졌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이제 더 이상 기억을 잃고 잠들지 않는다. 평상시의 나로 돌아온 것이다. 갑자기 배고픔이 느껴진다. 전에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기억을 잃었을 때 알아서 무엇인가 먹었겠거니,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이틀을 보내다가 나는 내 왼쪽 팔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참 맛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 불현듯 잃어버렸던 모든 기억이 떠오른다.





image : https://unsplash.com/photos/t0SlmanfFc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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