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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 Aug 10. 2022

변기 시트

황토와 참숯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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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 전봇대를 한 손으로 지탱하고 허리를 땅으로 꺾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여자가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자 음식이 썩은 듯한 냄새가 난다. 구토를 한 모양이다. 나는 소리 나지 않게 혀를 차며 그 옆을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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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또 그 여자가 같은 전봇대에 서있다. 오늘은 얼굴이 보인다. 전봇대에 등을 기대고 가로등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불빛으로 날아드는 벌레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그 위로 펼쳐진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입가가 젖어있는 것을 보니 또 구토를 한 모양이다. 

더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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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하고 그 여자가 나를 불러 세웠다. 삼일 연속 마주쳤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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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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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발바닥까지 내려가는 줄 알았다. 평생에 여자가 먼저 말을 건네는 일이 처음이다. 화장실 좀 쓸 수 있을까요.라고 무덤덤하게 말한다. 불가항력이다. 나는 홀린 듯 그녀에게 혼자 사는 방의 화장실을 내어준다. 아뿔싸. 이사 올 때 새로 샀던 황토 변기 시트가 황토 색깔보다 더 짙게 변색되어 있던 것이 기억나버렸다. 나는 위장을 입으로 쏟아낼 듯 구역질을 하는 그 여자보다 더 얼굴이 빨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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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하면 별이 뜰 때까지 학교 도서관을 떠나지 않는 나지만, 오늘은 점심을 먹고 난 후  변기 시트를 새로 사들고 집으로 향했다. 왠지 오늘도 전봇대에 기대어 있을 것 같은 그 여자가 다시 한번 무덤덤하게 우리 집 화장실을 빌릴 것 같다. 더러워진 황토 변기 시트를 내 다 버리고 얼룩이 생기지 않고 악취까지 잡아준다는 참숯 변기 시트를 설치하고 나니 왠지 모를 뿌듯함이 느껴진다. 오늘은 등을 두드려줘야겠다. 그리고 몇 살인지 물어봐야지.




image source: https://unsplash.com/photos/xXc7zUKIhR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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