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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 Aug 10. 2022

선지

그녀는 새빨갛다

"오빠, 집에 올 때 미역국 끓이게 고기 좀 사다 줘요."


퇴근 무렵, 아내로부터 온 전화에 집 근처 시장 입구에 있는 정육점에 들렀다. 조리모를 쓴 채 엄지손가락을 세우고 있는 돼지와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소가 간판을 장식하고 있는 정육점 앞에는 여느 때처럼 속이 깊은 빨간 플라스틱 통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대개 그렇듯 통 안에는 새빨간 혀 같은 선지가 아무렇게나 굳어있다. 그 묘한 입체감이 피카소의 그림을 떠오르게 한다. 나는 정육점 입구에 서서 물끄러미 선지 덩어리를 바라본다. 생각나는 사람이 하나 있다.


그녀는 '막무가내'라는 말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여자였다.


무엇이든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했다. 별 탈없이 다니던 고등학교를 홧김에 자퇴하고 머리를 새하얗게 염색했던 그녀는 내 친구의 여자 친구였다. 내 친구의 여자 친구였던 그녀는, 수능을 마치고 맞은 마지막 고등학교 겨울방학 때 나의 여자 친구가 되어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의지였으며 나의 의지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내가 그녀와의 교제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남학교를 다닌 탓에 여자 친구를 사귈 기회가 없었던 내게 적극적인 그녀의 태도는 오히려 고마울 따름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못난 얼굴이기보다는 오히려 예쁜 축에 속했던 것이다. 


연인임이 공식화되었을 무렵 그녀의 전 남자 친구인 동시에 내 친구인 그로부터 연락이 왔다. 절대 그녀와는 사귀지 말라는 부탁이었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듣고 친구에게 적잖은 실망감이 들었다. 그녀의 성격이 좋지 않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만류하는 거라고 했다. 그때 나는 그 말이 자기가 사귀고 헤어졌던 여자가 다른 남자를 사귀는 꼴이 보기 싫은 옹졸함때문이라고 치부했었다. - 물론 나였더라도 그런 맘이 들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 결국 나는 그녀와 사귄 지 두 달만에 나 스스로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술이 먹고 싶다던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편의점에서 소주 한 병과 감자스틱 하나를 사 왔다. 그리고는 편의점 옆 건물 지하에 있던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며 술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금세 소주 한 병을 더 비우더니 한 병을 더 사 왔다. 소주를 반쯤 비웠을 때, 그녀는 노래방 소파에 쓰러졌다. 나는 그녀를 업고 좁은 통로의 계단을 오르다 내 머리카락을 휘어잡으며 내려달라고 소리 지르는 그녀를 벽에 기대어 세워 주었다. 그녀는 이내 먹었던 술을 게워내기 시작했다. 내장을 다 쏟아낼 것처럼 격하게 몸을 떨며 속을 비운 그녀는 다시 계단에 쓰러져버렸고, 나는 그녀를 업고 집으로 향했다. 대개가 이런 식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모든 삶을 주도했고, 아주 작은 남의 간섭도 허락하지 않았다.


하루는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내게 말했다. 


"네가 만약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면, 나는 네 결혼식에 찾아가서 선지피를 뿌릴 거야."


전혀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 그녀의 말에 나는 그녀가 아닌 다른 여자의 새하얀 웨딩드레스가 새빨갛게 물들어버리는 장면을 상상했다. 소름이 끼쳤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그럴 리가 있냐고 둘러댔다. 바닥에 떨어지며 여러 조각으로 부서져 흩어지는 선지 덩어리들이 벌써 눈앞에 선했다. 사실 그녀가 그 말을 꺼낼 때쯤 나는 이미 헤어지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단언에 나는 용기를 잃고 말았다.


그랬던 그녀와 내가 헤어지게 된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내가 더 이상 그녀의 맘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허탈함과 동시에 안도감을 느꼈고, 그녀 없이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그녀가 찾아왔다.


새벽 2시였다. 뜬금없이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한두 마디로 전화를 끊고 다시 잠을 청하려는 나에게 그녀는 지금 당장 나오라며 생떼를 부렸다. 아니, 사실 거의 명령 수준이었다. 집 앞에 있으니 나오지 않으면 소리를 지르겠다는 것이다. 나는 순식간에 두통이 찾아오는 것을 느끼며 외투를 챙겨 입고 부모님 몰래 집을 나섰다. 그리고 날이 밝을 때까지 설득한 끝에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녀는 그 후로도 세 번이나 나를 찾아왔다. 강의실로, 술자리로, 버스 정류장으로. 예고 없는 그녀의 등장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고, 진땀을 흘리며 그녀를 달래주었다. 그녀는 버스 정류장에서의 뒷모습을 끝으로 더 이상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 후로 나는 세 명의 여자를 더 만났고, 스물여덟이던 지난해 결혼을 했다. 신부가 입장할 때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이 두근거렸다. 그것은 신부가 내게 다가오는 설렘이 아니었다. 누군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양동이를 들고 나타나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주례를 할 때는 돌아보면 그녀가 있을 것만 같았다. 한 시간 남짓했던 결혼식은 내 평생 가장 길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6700원입니다." 


나는 까만색 비닐봉지를 건네받고 정육점을 나섰다.


"오랜만이네."


낯익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린다.


 ".. 선지야."


돌아보니 그녀가 있다. 오늘따라 선지가 더 새빨갛게 보이더라니, 하고 혼잣말을 했다. 

그녀의 이름은 선지(善知)다.




image source: https://unsplash.com/photos/U4c7VjfMxO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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