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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 Aug 10. 2022

샤박 샤박

셔벗 같은 눈

간밤에 내린 눈으로 온 세상이 하얗게 덮였다. 잠에서 깬 윤수는 창문으로 보이는 세상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윤수는 눈이 싫다. 눈이 오면 길도 막히고 구두도 더러워진다. 그 두 가지 만으로도 눈은 충분히 비호감이다. 그런데 윤수에겐 겉으로 드러나는 이 두 가지 단점 외에 눈을 싫어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어쩌면 길이 막히고 구두가 더러워지는 건 별 문제가 아닐는지 모른다. 하지만 눈이 오면 떠오르는 그 사람만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빌어먹을, 하고 작게 중얼거린 윤수는 서둘러 출근 준비를 했다. 이런 날은 집에서 나서는 시간도 애매하다. 


윤수가 타는 회사 통근버스는 7시 28분쯤 H아파트 정문 앞에서 정차한다. 회사 노선표에는 7시 26분이라 나와있지만 빠르면 25분, 늦을 땐 32분에 도착하곤 한다. 대충 평균을 내보면 28분쯤이 되는 것이다. 윤수는 보통 20분이면 아파트 앞에 도착해 버스를 기다리기 시작한다. 버스를 기다리는 조금 지루한 시간이 행여나 버스를 놓쳐 지각하게 되는 편보다 낫다. 이렇게 눈이 왔거나, 혹은 오고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통근버스가 15분 정도 늦곤 하는데, 그렇다고 15분 정도 늦게 나가서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다 보니 이런 날은 필연적으로 길게는 20분이 넘게 추위에 떨어야 한다. 윤수는 '좌우지간 겨울도, 눈도 모두 맘에 안 들어'라고 투덜대며 집을 나섰다. 


도로변에 쌓여있는 눈은 벌써 녹기 시작해 콘크리트 맛이 날 것 같은 잿빛 셔벗처럼 보였다. 윤수는 자동차가 튀긴 물에 더럽혀진 눈 더미에를 한번 쏘아보고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때 골목에 주차되어있던 흰색 승용차 밑에서 후다다닥, 하고 얼룩 고양이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깜짝 놀란 윤수가 고양이를 피하다가 길 옆으로 휘청거렸다. 중심을 잡느라 다리가 어긋났고 결국 도로변에 있던 그 잿빛 눈더미를 철퍽! 하고 밟게 되었다. 지저분해 보이는 물과 눈이 구두 주변으로 튀며 반대편 바지자락에도 얼룩을 묻혔다. "에이, 씨!" 윤수는 고양이를 향해 욕을 내뱉었다. 고양이는 몸을 바닥에 바싹 붙이고 윤수를 알듯 모를듯한 표정으로 응시하다가 이내 반대쪽 골목으로 모습을 감췄다. 윤수는 발을 빼내다가 샤박, 하고 한 번 더 옆에 있던 눈 더미를 밟았다. 다시 한번 거친 욕을 내뱉으려던 윤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처음 밟았던 너무 많이 녹아 무른 눈 더미의 찝찝함 대신 상큼한 감촉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윤수는 시험 삼아 그 옆에 조금 더 깨끗해 보이는 눈 더미를 밟아 보았다. 


샤박. 


'어라...?' 윤수의 입가에 눈송이 같은 웃음이 작게 맺혔다.


눈이 쌓여있는 곳 주변을 꼼꼼하게 밟아보던 윤수는 눈 더미에도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눈으로는 구별이 어렵지만 녹은 정도에 따라서 밟았을 때의 소리가 제각각이었다. 이를테면 너무 많이 녹아 무른 눈, 즉 윤수가 처음 밟았던 찝찝한 눈은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으로 물과 녹은 눈이 많이 튀었다. 하지만 조금 더 덜 녹은 눈을 밟으면 찰박, 그다음은 샤박, 그다음은 서벅, 하고 소리가 났다. 가장 상큼한 느낌이 드는 것은 역시 '샤박'이었다. 구두 주변으로 물이나 눈도 튀지 않을뿐더러 밟을 때 나는 촉감은 마치 부드럽게 발을 감싸안는 고운 모래사장의 그것과 비교될 만큼 좋은 기분이었다. 


윤수는 마음속으로 그 눈을 '샤박눈'이라 정했다. 

그리고 샤박눈 같아 보이는 눈 더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샤박눈인 줄 알고 밟았다가 철퍽 눈인 경우도 있었으나 어느새 요령이 생겨 기분 좋은 샤박눈만을 밟으며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윤수는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겨울과 눈을 싫지만 이 샤박눈은 마음에 들었다. 늘 무미건조했던 통근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소소한 행복이 생긴 것이다. 이른 아침시간이고, 워낙 인적이 드문 골목이었기에 사람들의 눈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좋아하던 어떤 것이 싫어지게 되면 상실감과 슬픔이 밀려오지만, 이렇게 윤수처럼 싫어하던 어떤 것이 좋아지게 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변화인 것이다.


하나같이 무채색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버스를 기다리는 윤수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당신들은 지루하고 지치고 쓸쓸해 보이는 군, 어제까지만 해도 나 역시 마찬가지였지. 하지만 지금은 달라. 난 샤박눈을 밟고 왔으니까.' 스스로조차 터무니없는 우월감이라는 생각에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지만 그 역시 왠지 즐겁게 느껴졌다. 한 술 더 떠 이 상큼한 샤박눈을 널리 알리고자 '전샤연:전국샤박눈밟기 연합'을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도 하는 윤수였다. 전샤엽. 아, 이름도 어쩌면 이렇게 상큼한지!


버스에 올라탄 윤수는 창밖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가 내내 춥길 바랬다. 일이 끝난 후 집에 돌아가는 한 번 더 샤박눈을 밟고 싶었기 때문이다. 


변함없는 평범한 일상을 마친 윤수는 서둘러 통근버스에 올라탔다.

평소에 앞자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 윤수는 운전기사 옆, 바로 앞자리에 앉았다. 시원하게 펼쳐진 버스 앞의 시야로 보이는 바깥 풍경 속에서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샤박눈을 찾았다. 아, 저 눈도 상큼하겠다. 오? 저 눈은 너무 녹았군. 아침의 바람대로 추웠던 날씨 탓에 모양이 상하지 않은 눈 더미들에 상큼 점수를 매기던 윤수는 내릴 때가 되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집으로 향하는 골목의 도로변은 그늘져있는 곳이 많았기 때문에 아침에 윤수가 남겼던 발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어린아이들이 사는 동네도 아니었기에 마른 길을 두고 일부러 도로변의 눈을 밟으며 다니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주위를 한 두 번 살피던 윤수는 다시 샤박눈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발바닥으로 전해져 오는 그 묘한 쾌감을 표정으로 애써 드러내지 않으며 걷던 윤수는 문득 자기 뒤에서 또 하나의 샤박 거리는 소리가 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윤수가 밟으며 나는 그 소리보다는 훨씬 작았다.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자 아침에 봤던 그 얼룩 고양이가 몇 발자국 뒤에서 윤수를 따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하,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고양이도 윤수를 따라 웃음 짓는 것 같았다. 마치 '샤박눈, 너도 아는구나?' 하는 웃음이었다. 


얼마간 함께 샤박눈을 밟으며 걷던 얼룩 고양이는 윤수의 집 두 블록 전쯤 좁은 건물 사이로 걸음을 돌렸다. 윤수는 헤어지기 전 눈인사를 건네는 고양이에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집에 거의 다 도착할 때쯤, 갑자기 눈보다 더 차가운 얼굴과 목소리로 이별을 건네던 그 사람이 떠올랐다. 함께 샤박눈을 밟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이 오면 함께 지금 이 눈처럼 상큼한 셔벗을 먹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머릿속으로 그 사람의 얼굴을 어렴풋이 떠올렸을 때, 집 앞에 있는 사람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설마, 하는 마음이 들었다. 언제까지나 함께 일 것이라 생각했던 그 익숙하고 따뜻한 그림자와 닮았다.


샤박샤박, 샤박샤박. 윤수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 사람이다. 그 사람이다.




image source: https://unsplash.com/photos/wFjSDliG7x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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