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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영어학원 원장과 읽는 «에밀»

아동기의 교육 - ⑤ 아동기 교육의 끝

by 차아안

“선생님, 저 구구단 외울 수 있어요! 이일은 이, 이이 사, 이삼은 육, 이사 팔…”

“오! 대단하네. 근데 왜 이구 십팔이야? 2랑 9랑 더하면 11이잖아?”

“아, 20에다가 9를 빼면… 아니, 2를 9랑 더하면… 모르겠어요.”

어딘가에서 구구단을 배우고 온 여덟 살짜리의 자랑은 아쉽게도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다. 아이가 무엇인가를 배울 때 모든 것을 다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것을 배울 때의 효용을 모두 다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해서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뒤쳐지기 쉽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배움의 동기나 깊이에 대해서 아이는 고민해야 한다. 이것은 아이 스스로 하기 힘드므로 부모나 선생님들이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젊은 교육자여, 나는 당신에게 하나의 어려운 기술을 가르쳐주겠다. 그것은 아이를 훈계하지 않고 가르치는 기술,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해내는 기술이다. 하긴 이 기술은 당신들의 나이에는 맞지 않는다. 그것은 당신의 빛나는 재능을 곧 나타나게 하지도 않고, 아버지들에게 당신을 높이 평가하게 하지도 않으니까. 하지만 이것만이 성공으로 이끄는 유일한 기술이다.


아이를 훈계하지 않고 어떻게 가르치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어떻게 해내는가? 그것은 아이가 스스로 찾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만약, 내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싶다면, 스스로 그것을 원하게 만들어야 한다. 영어로 재미있는 게임을 하거나,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아이가 그것을 하고 싶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어, Simon Says 게임을 한다. 이것은 “Simon says ‘Touch your nose.’”라고 말하면, 아이는 코를 만지는 게임이다. 이때 “Simon says”를 말하지 않으면 그 행동을 하면 안된다. 아이들은 “Simon Says”를 말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유심히 듣지만, 자연스럽게 뒤의 명령어에도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나중에는 “Simon says ‘Name something you like but your mom doesn’t”이라고 하면, 아이들은 자기가 좋아하지만, 엄마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을 찾아서 말하게 된다.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집중해서 들으라고 반복하지 않아도, 영어는 재밌고 유익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영어를 즐겁게 사용하게 된다.


하지만 어려운 점은, 이런 교육은 생각해내기도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리고 교육의 성과가 잘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수동적인 훈육을 많이 받은 아이들일수록 흥미로운 활동에도 시큰둥하다. 막상 해보면 즐거워하지만, 막연히 교육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아이들도 있다. 그럴 때도 인내심을 갖고 천천히 아이가 스스로 원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지혜를 조금만 써도, 아이에게 허영심이나, 경쟁심, 질투심을 일으키게 하지 않으면서 취미와 정열을 가지게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아이의 활발함과 모방 정신만으로도 충분하다. 특히 아이의 자연스러운 쾌활함, 이것이 확실한 실마리가 되는데, 교사들은 그에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아이는, 다른 경우라면 눈물을 뚝뚝 흘리지 않고서는 견디기 어려운 일을, 스스로 놀이라고 인정하는 모든 놀이에서는 불평하지 않고, 아니 웃으면서 견딘다”.


아이들은 재미있는 것은 기를 쓰고 한다. 하지 말라고 해도 한번 더 하고, 못하게 해도 숨어서 한다. 배움도 그렇게 시작해야 오래 간다. 최소한 초등 6년, 중고등 6년, 총 12년을 해야 하고, 대학까지 하면 16년은 해야 하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하기 싫은 일을 효과적으로 할 수는 없다. 설령 그렇게 공부를 해내고 입시에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 하더라도 그 아이의 성장은 거기에서 멈춘다. 자기 욕망을 잘라내고, 하기 싫은 것을 참고 하는 것에 익숙해진 아이는 정작 자기의 꿈을 펼치고 능력을 발휘해야 할 때, 이미 지쳐있다. 그에게는 이제 자기의 목표를 설정하고,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주도적인 삶을 사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니, 아동기의 부모와 선생은 잠시 배움을 늦출 일이다. 한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지만, 책 읽는 것을 싫어하게 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렇게 스스로의 삶에 기반하여 억지로 배우지 않은 아이들은 어떻게 자랄까? 하고 싶은 일은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로 나뉘고, 하고 싶은데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아이들은 스스로 길을 찾으려 노력하게 된다. 억지로 배운 것이 없기 때문에, 배움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더 쉽게 하도록 도와주는 도움이라고 생각한다.


루소가 자랑하는 아동기가 끝나가는 학생을 보자.


“그(학생)가 남에게 부탁하는 태도를 보면, 아무에게도 그의 부탁을 꼭 들어주어야 할 의무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이 구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은혜로서 주어진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또 인간애가 그러한 것을 주도록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의 표현은 간결하고 쉽다. 그의 목소리, 눈의 표정, 태도는 상대가 그의 부탁을 들어주든 들어주지 않든 변화가 없다. 그것은 노예의 혐오스러운 복종도 아니고, 지배자의 명령적인 군림도 아니다. 동포에 대한 겸허한 신뢰이며, 또 자유스럽지만 감수성이 예민하고 약한 자가 자유스러우면서 강하고 친절한 자의 도움을 구하는, 고귀하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부드러움이다. …… 그의 눈은 주의 깊고 정확하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바보처럼 남에게 질문하지 않고 스스로 그것을 조사할 것이다. 그리고 알고 싶은 것은 남에게 묻기 전에 스스로 발견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제 아동기의 교육이 끝났다. 다음 글부터는 드디어! 소년기의 교육으로 들어간다. 지금까지 교육의 준비단계라고 한다면,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교육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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