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게 보내는 편지_0506

어버이날

by 천문학도

아마 이 편지는 거기로 닿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니 부끄럽지 않을 거 같으니 진솔하게 적어볼 거예요


어쩌면 그곳에서 저를 실컷 원망하고 있겠죠


내가 선택한 사랑이 때론 못 된 선택을 하게 해요.

그 선택으로 인해 마당에 서 있던 할아버지의 오랜 발걸음 소리를 놓치고 말았네요.


이제 와서 지난 일 후회하면 소용없으니 오늘만 할게요


아빠는 형 동생 저 보단 소파와 더욱 친해지고 있어요.

소파한테 가끔 질투가 나지만.. 소파 위에 놓인 핸드폰 안에 유튜브 영상에 더 질투가 나지만... 그만큼 아빠와 아들의 관계는 어려운 거 같아요.


아마 아빠도 할아버지한테 이런 감정이었겠죠


문득 할아버지의 티브이 소리가 생각나요

방에서 티브이 소리를 크게 틀어놓고 손자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마음이 전화로 표현하는 거였네요. 이제 출발했으려나 하는 통화 한번 차가 막혀서 늦어지려나 중간에 또 한 번, 시골에 도착하기 전에 마지막 전화 한번, 그때의 제가 느낀 귀찮음은 이제야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란 걸 느끼네요


동생을 잃은 아빠의 모습.. 자식을 잃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 사실 전 아직도 어려서 잘 몰라요.


아빠의 그늘이 아니 아빠가 무너지는 순간을 처음 봤어요.


소파에서 터져 나오는 눈물을 닦아드릴 수가.. 그냥 아무 위로도 할 수 없었어요 사실 저도 많이 무너져 있었거든요.


매일 옆동네에 있을 거 같은 웃음 만개한 작은 아버지였는데.. 추울 때 반바지 입고 자전거 탄다고 잔소리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또 간밤에 추워지니 귓가에 그 잔소리가 맴돌아요.


근데 몇 년이 지나도 그 잔소리가 그리운지 추울 때 반바지를 아직도 입고 다녀요


아버지가 무너지는 순간을 보고 나니 아버지를 지키고 싶었어요. 물론 지금도 잘 지킨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할아버지가 했던 대로 다혈질이며 엄마한테 아직도 큰 소리 꽥꽥 지르거든요. 그러면 전 잠시 있다 아빠한테 엄마한테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 잔소리를 하곤 해요. 그리고 할아버지처럼 티브이도 영상도 너무 큰 소리로 들어요.


나중에 보청기를 낄 거니 괜찮대요! 참 웃기지 않아요? 할아버지.. 그래서 제가 아빠한테 어차피 죽을 건데 왜 열심히 살아 함부로 살지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더니 한 동안은 집안이 조용했어요.


근데 자꾸 아빠가 걱정되는 마음이 커지는 건 어쩔 수 없고 부드럽게 말하고 싶어도 잘 안되네요.


얼마 전 아빠의 고등학교 졸업사진을 보고 놀랬어요. 제 모습의 95%가 보여서 그저 입이 벌어지는 순간이었어요. 어쩌면 할아버지는 고장 난 시계를 고쳐주며 주는 대상이 저가 아니라 어린 시절의 아버지 모습이 보였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이렇게 길게 적으면 그리움이 좀 줄어들 줄 알았는데 더 푸르게 짙어지는 거 같네요.


엄마가 가끔 아빠를 욕할 때도 있지만 할아버지 이야기만 나오면 서운한 소리 없이 칭찬하기에 바빠요.


아빠가 외가를 친가를 사랑하는 반만큼이라도 하지 않아서 짜증이 났지만 엄마가 그의 반을 할아버지에게 쓰고 있었던 거 같아요.


몸이 아파오면서까지 형제와의 관계를 힘쓰다 때론 눈물을 보인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요.


옆에 할머니도 같이 잘 지내시죠?


할머니가 모두에게 어린양처럼 행동해서 때론 가족들이 힘들었지만 할머니 행동의 근원은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할아버지가 없는 그 빈자리를 자식에 대한 사랑을 채우고 싶었을 거예요.


그래서 지금은 할머니를 미워하지 않아요.


미워한다면 오히려 자주 뵙지 못한 두 분에게 죄송해요.


그리고 항상 친가 갔다가 외가 가서 서운했을 외할아버지.. 이번 편지에서만큼은 앞에서 쓰고 싶었는데.. 엄마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


할아버지의 잘생긴 얼굴은 엄마의 지갑 속에 잘 간직되고 있어요. 할머니는 점점 기억력이 잃어 가시지만 그 누구보다 자식들이 잘 지키고 있어요.


엄마가 시골에서는 꼬마라는 별명이 있어도 여기 서울에서는 아무한테 지지 않는 강인한 꼬마예요.


저도 그 강인함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나름 앞에서 강인한 척 하면서 남 몰래 많이 울고 있네요 하하하핳..


같이 못 보러 간 고인돌은 하늘에 올라가면 같이 보러 갈 수 있겠죠?


작년 한 해는 여러모로 참 힘들었어요. 엄마한테 피눈물 흘리게 했거든요. 그래서 더더욱 할아버지한테 죄송해요. 꼬마의 눈에 울음 대신 웃음이 한 다발이 될 수 있도록 올해는 더 노력해 볼게요.


옆에 소파 위에서 코 고는 아빠를 힘껏 안아줬는데

눈물범벅이에요.. 저도 참 주책이에요 핳하하핳..


이 긴 편지는 우체국 아저씨가 말하기를.. 하늘로 가는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못 간다고 해요. 그러니깐 그 위에서도 때론 웃으며 때론 살벌하게 지켜봐 주세요.


사랑해요


외할아버지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작은 아빠


올해는 꼭 산소에 들릴 테니 꿈에라도 한번 나와주세요


그리고 다가오는 어버이날

엄마 아빠 사랑합니다.


못난 손자이자 자식인

동시에 못 말리는 조카인 이건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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