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듯하나 먼 연애
"여보세요. 잠자고 있었어?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일이 요새 힘들어서 깜박 잠들었네.. 못 받아서 미안"
"목소리 듣고 싶어서 연락했어! 잘 자고 사랑해"
"나도"
당장 내년에 결혼을 앞두고 있다.
연애보다 결혼하고 싶다고 말하는 여자친구는 이 친구가 처음이었다.
내가 안정적인 사람이라서 좋다고 다정한 사람이라서 좋다고 자주 말해왔다.
그 안정이란 말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지 다들 안정적인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한다.
일종의 유행처럼 번지는 이 말이 별로 달갑지 않다. 난 불안정한 사람이고 이 사람을 만나서 안정화된 경우인데..
그래서 안정적인 말에 대한 반론은 항상 속으로 생각해 왔다.
우리가 처음 만난 건 동네에 산책하기 좋은 공원이었다.
퇴근하고 공원에 도착하면 저녁 7시, 그 시간에 맞춰 일주일에 3번씩 러닝을 하였다.
한 바퀴에 2km라 세 바퀴씩 열심히 지나가는 풍경들을 감상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강아지 두 마리를 끌고 산책 나오는 여자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바지는 누가 봐도 잠옷이고 상의는 항상 자주색 외투를 입고 소형견 두 마리와 헐레벌떡 공원을 뛰어다녔다.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사막여우를 닮은 강아지, 다른 한 마리는 '어린 왕자' 속 상자 속에 숨어 있는 양을 연상케 했다.
난 강아지가 몇 살이라고 물어볼 수 없었다. 그건 양에게 실례되는 질문이었다.
다만 멀리서 젊은 강아지가 가까이서 보니 눈가의 주름은 노견의 세월을 말해주었다.
여자가 먼저 말을 걸었다.
"강아지 혹시 키우세요?"
"아니요.. 혹시 이 양 닮은 강아지 찍어도 되나요?"
"네"
공원에서 마주칠 때마다 러닝이 끝나면 어김없이 양 닮은 강아지에게 말을 걸며 친해지기 시작했다.
사실 양은 핑계일 수도 있지만 양에게 진심이었다.
빈 손으로 가던 러닝에 강아지 간식을 챙겨주는 날 보며 문득 웃음이 나왔다.
원래 동물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지만 이상하게 양 닮은 강아지에게는 시선이 절로 갔다.
강아지를 자주 산책을 다녀서 그런지 강아지들의 눈빛이 탁하기보단 청청한 하늘처럼
파란색이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강아지 주인이 다시 말을 걸었다.
"여기 말고 일주일에 한 번씩 산책 가는 곳 따로 있는데 가보실래요?"
양을 안고 있는 남자는 말했다.
"좋 아 요"
우리는 자연스럽게 연락처를 교환했다.
양으로 갔던 내 시선이 그녀에게는 쏠리는 순간이었다.
넌 할 말 절반만 줄이면 연애할 수 있어라는 친구의 말에 응답한 듯
생각의 절반을 들어내며 그녀와 서슴없이 친해지기 시작했다.
강아지들은 늘 앞장서 걸었고 그녀는 나의 한마디 한마디에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녀의 미소가 내 미소가 되고 싶을 순간들이 많아졌고 일종의 고백도 없이 자연스레 만나기 시작했다.
애교도 적당히 부릴 수 있고 내 일상을 먼저 물어봐주는 다정한 여자친구였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가면 뒤에 까마득한 것을 잊고 있었다.
그건 바로 그 사람의 본성이다. 가면은 생각보다 빨리 벗겨졌고 그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건 수동적인 태도였다.
어딜 가자고 그러면 의견 없이 날 따라오기만 하지 다음에 갈 곳도 나에게 의지했다.
그동안 해왔던 이쁜 말들과 연락들이 횟수는 점차 줄어들었다.
이게 사랑인지 짝사랑인지 형태를 알 수 없게 되어가고 있는 시점이었다.
난 다그치고 그 친구는 도망치고.. 번번이 너에게 수갑을 채우는 모습에 나는 지쳐갔다.
시간을 내서 만나는 게 아니라 시간이 나면 만나려고 하는 게 과연 사랑인지 의문스러웠다.
왜 먼저 연락을 안 할까?
잘 자!, 오늘 하루 어땠어? 이 말이 그렇게 힘든 일인가?
입은 있는데 대답은 없고, 손은 있는데 연락이 없고
이건 연애 싸움이 아니라 인내력 테스트였다.
나도 없는 체력에 열심히 먼저 용기 내서 연락도 하고 안간힘을 썼지만
관계는 썩 좋지 않았다.
헤아려주는 내 마음은 이 친구에게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다.
어쩌면 이미 난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던 거 같다.
초반의 그 사람과 연애 후반의 이 사람 그 둘 저울재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중량 차이에 난 도망치고 싶었다.
이번엔 내가 도망칠 테니 네가 추격하기를 바랐지만
넌 그냥 도망치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을 위해 원래 그런 사람이라며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널 보며
난 이 연애가 감히 가벼운 연애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