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같이 비가 내리는 날엔 파전과 막걸리, 뜨끈한 해장국이 생각난다. 특히 간밤의 술기운이 남아있는 아침엔 해장국 생각이 간절해진다. 이상하게도 해장국만은 깨끗하게 잘 차려 나오는 집이 아닌 허름한 국밥집에서 먹어야 제 맛이 난다. 또 그곳에서는 모여든 모든 이가 평등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어느 가난한 예술가가 한 잔 술과 해장국을 앞에 놓고 골목집에 앉아 삽화를 끄적일 것만 같다. 그런 기분에 젖어 찾아가는 골목이 있다.
종로 낙원상가 근처 골목엔 2천5백 원짜리 황태해장국집이 있다. 그 옆 맛집 동방홍은 사골 청국장이 3천 원이고 맞은편 건물엔 2천 원하는 우거지 해장국이 밥, 깍두기, 고춧가루랑 함께 나오는 집이 있다. 비현실적인 가격에 한 끼를 해결하는 주머니가 가벼운 사람들의 성지이다. 간밤의 숙취로 느글거리는 속은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지만 이 해장국만큼은 제한이 없다. 해장국집 입구의 커다란 양은솥에서 펄펄 끓는 우거지탕은 보기만 해도 세상만사 근심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너무 뜨거운 탓에 가끔 입천정이 벗겨지기도 하지만 국을 식혀 먹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뜨거움을 삼키러 왔기에, 굳어버린 육신을 풀러 왔기에 그 더운 김에 얼굴을 담그는 것이다.
수십 년 동안 밥집을 지켜온 할머니는 온갖 술꾼들을 상대해온 여유로운 표정으로 해장국을 그릇에 담는다. 함께 일하는 사람은 초로의 여인이었다가 중늙은이 남자이었다가 젊은 조선족 아낙이었다가 최근에는 네팔이 고향일 것 같은 청년으로 바뀌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색의 젊은이는 아무 말없이 국과 밥을 날랐다. 그리고 고춧가루 두세 점 두른 시큼한 깍두기도 가져왔다. 궁금했지만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 것은 왠지 실례일 것 같았다. 그는 손님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멀리 국경선 너머를 향한 듯했다. 무표정한 그는 젊어서 더 쓸쓸해 보였다. (이 해장국집은 방송에도 몇 번 소개되어 가끔씩 젊은 커플들이 호기심에 들어온다. 그리고 인증샷을 sns에 올리며 즐거워한다. 식당 안의 반들거리는 오래된 통나무 탁자도 구경거리다.)
숙취에는 또 황태해장국만 한 것이 없다. 그냥 간판이 <황태해장국>인 집도 연세가 있는 여인이 오랫동안 운영했다. 이 집은 다소 넓은 우거지 해장국집과는 달리 협소해서 가운데 탁자가 없다. 들어갈 때부터 머리를 약간 숙이게 만드는 작은 알루미늄 출입문이 달려있고 삼면의 벽을 따라 두세 뼘되는 나무 탁자가 좁게 붙어있다. 메뉴는 황태, 우거지, 콩나물해장국 세 가지이지만 주력 음식은 황탯국이다. 수년째 2천 원이었던 값을 작년에 5백 원 올렸단다. 그것도 황탯국만. 머리 스카프를 단정히 쓴 주인은 황태 값이 비싸서 가격을 올려야 하는데 할아범들이 비싸다고 안 올 것 같다고 한숨을 쉬었다. 가게 밖의 간판에 인상된 가격이 붙어 있었다. 차마 나머지 메뉴는 값을 올리지 못하는 여인의 한 생이 비를 맞고 있었다.
이곳도 차림은 단출하다. 황태 살 두어 점과 흰 무 조각들과 두부 한 점이 든 더운 국과 밥과 중국산 김치가 전부이다. 고춧가루를 첨가할 수도 있지만 시원하고 담백한 그대로의 맛이 정겨워서 가끔 들렀다. 엄숙한 표정으로 쉬이 입을 열지 않는 여주인은 먹고 나갈 때는 정확하게 감사를 표했다. 2천 원이라는 가격에는 어울리지 않은, 무언가를 지켜내려는 마음에서 배어 나오는 응대였다. 그 집의 황태해장국에는 값을 매길 수 없는 무형의 무엇인가가 담겨있다.
그 앞에는 이발 5천 원, 염색 4천 원하는 이발소가 두 군데나 성업 중이다. 특히 염색하는 중장년 남성들이 많은데 대부분 진한 검은색을 선호한다. 적당히 진갈색 정도면 좋을듯한데 단연 검은색이 인기다. 점점 멀어지는 젊음에 대한 보상심리가 작용하는 탓일까? 그들은 이발소에 윗옷을 벗어놓고 염색약을 칠한 후 골목을 배회하며 담배를 피운다. 그렇게 좋은 일을 기대하며 느긋하게 머리를 단장하는 것이다.
국밥집들 사이로 리빙텔 숙소가 들어섰고 건물 사이엔 무허가 건축물일 듯한 타로점이 간판 불을 밝혔다. 손바닥만한 공간에 한 아가씨가 밀랍 인형처럼 앉아 있었다. 그렇게 국밥집은 생겨났다 사라지고 또 다른 샵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아직은 오래된 밥집들이 몇 개 남아있다.
국밥 선택은 그날의 기분에 따라 정한다. 아니다, 정확히는 뱃속이 원하는 대로 정한다. 말없는 위장이 숙취로 인해 울렁이며 하소연하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은 돼지국밥집에 들러서 5천 원짜리 국밥을 먹었다. 수수한 옷차림으로 문 앞에 선 주인은 매우 공손한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 국밥엔 고기 순대 건더기가 가득했다. 신선한 새우젓과 양파가 한껏 입맛을 돋웠다. 평상시에는 손대지 않는 매콤한 청량고추도 한 입 베어 먹었다. 옆 테이블에 앉은 초로의 신사는 오전부터 소주 반 병을 주문했다. 그의 술 마시는 울적한 심사가 느껴졌다. 혹시 서로 의지하던 마나님을 먼저 떠나보낸 건 아닌지...
비 오는 날 이곳에서는 긴장감이 사라진다. 아마도 별다른 격식이 필요하지 않은 식사 자리가 주는 편안함 때문일 것이다. 이곳에서의 느긋한 모습이야말로 모든 치장을 벗어버린 가장 진솔한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장마와 태풍으로 소나기와 이슬비가 쉼 없이 오고 간다. 골목에도 습한 공기가 가득하다. 국밥집의 더운 김까지 흘러나와 온 세상을 감싸고돈다. 마음의 수로에도 물이 차고 넘친다.
2천 원 하는 우거지 해장국 한 가지만 판다. 당연히 메뉴판도 없다. 처음 방문하면 서울에, 대한민국에 이런 곳이? 하고 누구나 놀라게 된다. (사진 상)
검은 염색약을 칠하고 이발소 주변을 배회하는 신사는 건너편 건물 처마 밑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사진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