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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형 Aug 09. 2020

사소한 풍경 14 - 보스턴

보스턴 일기


오래전 일이다. 대학 4학년 여름방학에 미국 브라운 대학으로 단기 어학연수를 떠났다. 뉴욕을 거쳐 대학이 있는 프로비던스에 도착했다. 미국에서는 보기 드문 유럽풍의 도시 분위기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아이비리그 대학은 그 자체로 보고 배울 것이 많았다.

연수 중 주말에 자동차로 약 1시간 거리에 위치한 보스턴을 방문했다. 미동북부에 위치한 보스턴은 이민자들의 최초 정착지이며 하버드 대학과 MIT를 위시한 학문과 역사, 문화의 메카이다. 그곳은 또한 미국의 독립운동을 촉발한 보스턴 차 사건이 발생한 장소이기도 하다.

1620년 102명의 청교도들이 종교적 자유, 사상적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을 떠났다.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66일간의 긴 항해 끝에 보스턴의 플리머스에 도착했다. 그리고 정착 첫 해에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 초기 정착은 해당 지역의 인디언들이 전수한 영농법에 의지했는데 정작 인디언들은 이민자들이 옮긴 천연두와 영역 갈등으로 인한 싸움으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보스턴은 저명한 사상가이자 문학가인 랠프 월도 에머슨과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활동 근거지이며 작가 에드가 엘렌 포의 고향이기도 하다. 미국 정치의 거물이었던 아일랜드계인 케네디 형제들 또한 이곳 출신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많은 미국인들이 이 지역을 마음의 고향으로 생각하며 성지 순례하듯 방문한다. 또한 이 도시명은 여성들에게 보스턴백으로, 야구 애호가에게는 보스턴 레드삭스로 친숙하다.

지금은 많은 미국인들이 아메리칸 커피를 즐기지만 당시 식민지 미국의 지배층은 영국의 홍차를 마셨다. 차 무역을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독점하며 높은 세금을 매기자 보스턴항에 도착한 값비싼 차를 미국의 젊은 독립운동가들이 무단으로 항만 앞바다에 수장시키고 만다. 이렇게 시작된 항의는 무력 충돌로 이어져 독립전쟁으로 확대된다. 하지만 화력의 우위를 점한 본국의 군대에 식민지군은 수세에 몰린다. 이때 북미 지역에서 영국과 식민지 경쟁을 벌였던 프랑스가 미국 독립군을 무력 지원하게 된다. 이후 전세는 역전되어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청교도들에 의해 건설된 미국의 상징적인 도시 뉴욕 항구 입구에는 기독교와는 거리가 먼 모습의 신상이 서 있다. 바로 자유의 여신상이다. 미국의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프랑스가 선물한 대형 조각상이다. 프랑스에서 제작하였는데 너무나 커서 200여 등분으로 나누어 운송해야 했다. 그러면 왜 이리 큰 조형물을 무리하여 보냈던 걸까?

자유의 여신상은 오른손에는 횃불을, 왼손에는 미국의 독립선언서가 기록된 판을 들고 있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로마식 겉옷인 토가를 입고 있다. 자신의 어머니를 모델로 삼았던 프랑스 조각가 바르톨디는 제국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이 거대한 작품을 완성했는데 이 여신상은 독립 1백 주년 기념 외의 복선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는 미국 독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독립된 미국은 핵심 세력인 영국계에 의해 운영되었다. 또한 정치, 경제, 군사 면에서 미국과 영국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발전했다. 이러한 국제적 역학 관계 속에서 프랑스로서는 자신의 역사적 의미를 미국인들에게 각인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이 거대한 조형물을 통해서.

여신상은 항구 앞 인공섬에 자리 잡은 탓에 신대륙으로 들어오는 이민자들의 눈에 들어오는 최초의 조형물이 되었다. 신상 기단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자유롭게 숨 쉬길 갈망하는 너의 지치고 가난한 무리들을 내게 보내다오...>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자유와 민주주의가 깊은 상처를 입고 있음을 보여준다. 국경 장벽이 설치되고 과도한 유색 인종 진압이 시민들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 코로나 전염병 대응에 대한 국가적 난맥상 또한 흔들리는 미국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여신상 아래 새겨진 문구가 무색해진다.


오래전 프로비던스와 보스턴의 고풍스러운 거리를 비추던 찬란한 햇살도 스러져가는 것일까... 슬프게도 이제 미국은 더 이상 <아름다운 나라>란 이름에 걸맞지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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