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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형 Nov 23. 2021

버려진 시를 줍다


예전에 한 시가 있어 조화로웠다


그 시가 어느 날 사람을 만나 눈을 떴다

사람의 말을 듣고 따라 하다 보니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더불어 싫어하는 것도 생겨났다


그로부터 시는 기쁨과 슬픔의 곡조를 익혔고

황무지로의 방랑길을 떠나곤 했다

온전했던 시는 그렇게

곳곳에 흔적을 남기며 흩어져갔다


시는

때론 숲 속에

때론 강가에

때론 깊은 산중에

때론 사람의 거처에

한 점씩 살과 뼈마디를 떨구었다


이윽고 더 이상 남길 것이 없자

구슬픈 목소리 하나만을 남겨 놓았다

그러나 그 소리는 오직 바람이 불 때에만

아련하게 메아리처럼 진동할 뿐이었다


강가에서 돌을 줍던 아이는

종종 낯선 물소리를 들었다

숲 속에 오디를 따면서

가끔씩 신비한 산울림을 느꼈다


소년이 찾아낸 것은 언어의 파편들

그 반짝임에 이끌려

다 자란 청년은 시가 다녀갔던 길 위에 섰다


젊은이는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풀꽃과 돌무덤에서

시의 잔해를 거두어 올렸다

그리고 그 쓸쓸한 아름다움에

기어이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사람을 대면하일은 시를 맞이하는 


무표정하게 하루를 사는 사람들

심장 언저리에도

희미하게 빛나는

시의 파편들이 박혀 있었


청년은 어느덧 세월을 겪었고

애환으로 가슴이 뒤틀릴 때마다

찾아 모았던 조각을 토해냈


버림받았던 시가 몸에서 돋아날 때

기쁨보다는 슬픔이 앞섰다


하늘과 바람과 들풀

그리고 나그네들의 뒷모습에

명멸을 거듭하는 시의 실루엣


버려져서 자유로운 시와 닳아진 영혼은

세상의 경계선에 서서

서로를 향해 닮아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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