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 조명 아래
동그랗게 눈 뜨고
가지런히 줄 지어 누웠다
육지 흉년도 비켜간다는
흑산도 앞바다
그 너른 물마당이 고향인데
수만의 물결로 퍼덕이던 은어들은
파란 바다를 한 입씩 토해내고
뜨거운 솥 안을 유영했다
사람의 시름이 깊어지는 저녁
서해 용왕의 분신들이
세파를 달래려 뭍에 공양하고
서로를 베고 누워 한 생을 접어낸다
* 흑산도로 유배 간 정약전은 그 섬의 해안 생태계를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그리고 <자산어보>에 기록을 남겼다. 그는 멸치를
추어로 표기하고 현지에서는 멸어라 부른다고 했다.
바늘 아닌 그물로 상처 없이 건져 올리는 생선. 봄이면 수많은 반짝임을 쏟아내는 은빛 무리.
식탁 위의 멸치에게도 지난한 생이 빈틈없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