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을 준비하는 시간
여행은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는 과정이 가장 설레고 흥분된다. 특히 낯선 나라를 여행하게 될 때 여행 동선을 짜기 위해 정보를 검색하고 공부하면서 이미 내 마음은 그곳의 땅 어디쯤을 밟고 있다. 나는 그 기분을 잊지 못해 매번 여행을 꿈꾸고 떠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해 유럽 여행을 준비할 때는 더욱 그랬다. 유럽에서 한 달 살기는 오랜 꿈이었고, 드디어 그것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가슴 벅찬 일이었다. 유럽의 크고 작은 수많은 나라들을 다 가보고 싶지만 여기저기 점을 찍듯 휘몰아쳐 다니는 여행은 나의 취향이 아니다. 신중하게 고민하고 검토하여 결정한 세 개의 나라를 여행하기 위해 한 달을 준비하고 드디어 짐을 쌌다. 딸아이와 둘이 떠나는 한 달의 여행은 이민 수준의 짐가방을 챙겨야 했다.
네가 있으면 어디든 두렵지 않다
마드리드로 가는 비행기는 막 이륙을 시작하고 드디어 한 달간의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기대와 긴장으로 잠을 설쳤는데도 기내에서 잠은 쉽게 들지 않았다. 13시간의 지루한 비행을 마치고 드디어 스페인에 도착했다.
마드리드에서 시작해 톨레도를 거쳐 세비야, 론다, 그라나다, 그리고 바르셀로나까지 스페인의 도시들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우리가 지나왔던 도시들 중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가 고급스럽고 웅장한 맛이 있기는 하지만, 나의 취향에는 세비야가 더 잘 맞았다. 나는 번화한 도시보다 고즈넉한 작은 마을을 더 좋아한다. 세비야는 마치 일본의 교토처럼 조그마하고 고풍스러운, 도시라기보다는 마을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세비야의 낡고 좁은 골목골목을 지나노라면 유년의 외갓집이 저절로 떠오르고, 달짝지근하게 행복하던 어린 날의 추억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바쁘게 사느라 살뜰하게 챙겨주지도 못했던 아이는 어느새 훌쩍 커서 낯선 여행지에서 어미를 안내하며 가이드 노릇을 톡톡히 한다. 자식은 아무리 어린 핏덩이라도 어미에게는 힘이 되고 용기가 되는 존재이다.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삶의 고비, 좁은 골목에서도 두려움을 이기고 지나올 수 있었던 것은 내 품에 자식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설프고 서툴게 자식을 키우며, 자식이 자라듯 어미도 자라 이제는 동갑내기 친구처럼 눈높이가 같아졌다. 자식을 키워봐야 사람 된다는 옛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내 자식을 키우다 보니 생명이 소중하게 여겨지고, 남의 처지도 헤아려지고, 부족한 것도 너그럽게 이해하게 되며 나도 조금씩 사람의 냄새가 나게 되었다.
화이트에펠의 기억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겠지
번화한 파리에서 마주친 파리지앵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길을 나서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어떤 일을 하건, 어떤 곳에 있건 아름답다는 것이다. 파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자유로우며 당당한, 그래서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
나는 늘 무언가에 쫓기듯 바쁘게 살아왔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이 컸으며, 노력에 비해 성과가 미미한 나의 현실이 불만이었다. 나와 남을 비교하기에 바빴으며, 남보다 부족한 나를 부끄러워했다. 내 아이의 미래는 나보다 나아야 한다는 생각에 부대꼈던 날들도 많았다. 그러나 인생의 길은 여러 갈래이며, 남과 같아야만 한다는 강박을 버리면 더 나은 길을 발견할 수도 있다는 것을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배운다. 내 아이의 길을 내가 만들어 줄 수는 없다. 아이 스스로 길을 찾고, 때로는 길을 만들며 가야 한다는 것을, 어미는 길을 제시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길에 나서게 다독이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길이 가르쳐준다.
밤의 에펠은 여행자의 쓸쓸함을 달래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따뜻하게 빛났다. 우리가 머문 숙소는 에펠탑 가까이에 있어 파리에 머무는 동안 숙소 베란다에서 새벽 1시면 어김없이 빛나는 은색의 에펠을 지켜봤다. 하얀 반짝임을 지켜보면서 각자 생각하는 것은 달랐겠지만, 우리가 같은 곳을 함께 보았던 기억은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공유할 기억을 하나 더 만들면서 우리는 조금 더 가까운 모녀가 되었다. 엄마와의 좋은 추억들이 하나하나 쌓이면서 초보 엄마가 입혔던 마음의 상처들이 흔적 없이 떨어져 나가기를 소망하며 불빛이 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크로아티아에서 시간을 잊다
우리의 마지막 여행지 크로아티아는 시간이 멈춰진 곳이었다. 두브로크니크의 성벽에서는 느리게 걸으며, 아드리아 해의 반짝이는 물살을 한 자리에 오래 서서 조용히 바라봐야 한다. 화려하지 않지만,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작은 마을들은 지나온 여행지에서의 일들을 돌아보고, 나를 돌아보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여행지에서 때로는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허물없이 어울리게 되는 경우가 있다. 한국에서 마주쳤더라면 말 한 번 섞지 않고 지나쳤을 사람들도 여행지에서 만나면 금세 친구가 될 수 있다. 플리트비체를 함께 여행했던 사람들은 나이도 직업도 제각각이었지만 트래킹을 하는 내내 즐거운 동행자가 되어주었다.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은 낯선 것에 대한 거부감이 없고 상대의 다양성을 이해해주는 넓은 마음을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이도 나도 유연하며 포용력 있는 사람이 되기를 빌며 투명한 에메랄드빛 호수를 건넜다.
우리는 또 어떤 길로 나서게 될까
낯을 많이 가리고 소심하던 아이는 집을 떠나올 때마다 자라났다.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고, 낯선 이들과 어울려 스스럼없이 밥을 먹는 모습은 영낙 없는 여행자다. 돌발 상황이 벌어져도 당황하지 않고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배포와 두려움을 모르는 용기도 길에서 길러졌다.
비행기는 밤하늘을 날고 옆자리에서 잠든 아이는 또 새로운 여행을 꿈꾸는 것일까. 돌아온다는 것은 또 떠날 준비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일상으로 돌아와 다시 분주하게 살아가더라도 견딜 수 있는 것은 새로운 곳이 우리를 기다린다는 설렘 때문이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몽롱한 정신으로 냉장고에 먹을 것이 있던가를 생각하고, 끼니 걱정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