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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술램프 Mar 22. 2021

  나무가 자라는 시간

                                  우리의 봄날은 눈이 부셨다


  지난 겨울은 지루하게 길었고 올 듯 올 듯 봄은 쉬이 오지 않았다. 날이 풀리기를 기다리다 모처럼 밖으로 나선 날 너는 분주히 봄의 냄새를 맡았고, 햇살을 받고 선 조그만 몸은 햇살보다 더 빛났다. 너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리라 생각은 했지만 가는 봄을 우리는 함께 보지 못했다.


  삶과 죽음은 찰나에 갈리는 것이라서 조금 전까지 옆에서 온기를 나누던 너는 내 손이 닿을 수 없는 세상으로 가 버렸다. 시시각각 뻣뻣해지는 너를 가슴에 안고 보호자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살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식어버린 너를 끌어안고 병원문을 두드렸고, 아무리 바늘을 찌르고 심장을 눌러대도 너는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지난번 발작처럼 곧 머리를 들고 숨을 쉴 것만 같은데 고대하던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 집 앞에 모란은 지천으로 피어있었고, 너의 마지막 옷은 그 꽃잎처럼 눈부시게 하얬다.  


  이별은 함께 한 시간만큼의 무게로 찾아와 숨을 쉴 때도 마른 침을 삼킬 때도 목젖까지 아팠다. 무수한 봄꽃이 피었다가 지고 잎이 나는 그 자리에 새들이 날아와 지저귀도록 무릎을 세워 안고 소리죽여 우는 날들이 많았다. 너와 함께 했던 산책길에서 이제는 없는 너를 떠올리고 무릎을 꺾으며 주저앉은 날도 있다. 내 목소리를 들으면 달려올 것 같아 너의 이름을 수도 없이 부르며 같은 자리를 맴돌았던 날도 있다. 너의 진료 예약일을 알리는 문자에 눈물이 쏟아졌고, 그들에게 너의 죽음을 전해야 하는 일은 힘겨웠다. 나는 그랬다. 너의 빈자리가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고, 돌아보면 바로 옆에 네가 있을 것 같았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우리는 분명히 서로에게 진심이었다. 사람만이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세상으로 네가 들어온 그 날부터 한순간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 사람만이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너의 체온을 느끼며 너와 함께 했던 매순간이 축복이었고 찬란한 봄날이었다.        


  

                                  여름을 지나 가을을 보내며


  슬프지 않은 이별은 없지만 마음을 나누고 함께 살아가던 존재의 빈 자리는 더욱 크다. 강아지라는 말로 부족한, 진정한 반려자였던 아이를 떠나보내고 우리 식구는 더 단출해졌다. 이제는 별이 되어버린 아이에게서 받은 행복과 기쁨은 우리가 나눠준 사소한 보살핌보다 몇 배 더 큰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언어로도 충분히 교감하며 세 식구가 의지하고 살아왔고, 이제 둘이 남아 떠나간 아이를 추억한다.


  나는 종교인도 아니고, 내세나 환생을 믿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지없이 순수하고 해맑은 나의 아이가 영원히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이승에서의 행복했던 기억만으로 가볍게 훨훨 날아다니다가 할 수만 있다면 다시 태어나기를 소망한다. 다시 올 때는 고작 스무 살도 안 되는 삶 말고 백 년 넘는 한평생을 누리게 됐으면 좋겠다. 맛있는 것도 실컷 먹고, 아프지도 말고, 어디든 제약받지 않고 거침없이 다니는 건장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오래도록 사랑받고 살았으면 싶다.  


  한 해가 저물어간다. 여름을 지나 가을이 깊어가며 마음도 많이 단단해졌다. 슬픔에 취해 잊고 있던 것들을 다시 떠올려 행복했던 추억에 젖을 수도 있게 되었다. 낙엽이 쌓이듯 내 마음에도 그리운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간다. 묵은해를 보내며 나이를 또 한 살 먹는다. 나는 비바람을 견디며 몸집을 키우는 오래된 나무처럼 아픔과 그리움의 나이테를 하나 더 두르고 굳건히 자리를 지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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