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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술램프 Mar 22. 2021

지금이 가장 찬란한 나이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 사랑할 것을……. // 모든 순간이 다아 / 꽃봉오리인 것을, /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 정현종,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한 해가 저물어가고 저절로 반성의 시간을 갖게 되는 12월이면 떠오르는 시가 있다. 정현종의 시처럼 모든 순간순간은 다 꽃봉오리처럼 눈부시게 피어날 수 있다. 누군가 내게 가장 눈부셨던 때가 언제냐고 묻는다면 나는 지금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충실히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의 가장 찬란한 순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느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는 오늘이 가장 소중하기에 나는 지난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의 스무 살, 서른 살 시절은 열정과 의욕은 넘치나 직진만 하던 때였다. 그 시절의 나는 오히려 지금보다 더한 편견으로 세상을 재고 평가했다. 남들과 견주느라 하루하루가 버겁고, 가진 것보다 가지고 싶은 것이 더 많아 피로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결혼 초 아이가 어릴 때 신도시의 주공아파트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아파트 단지 내에 조그마한 시장이 있었는데 퇴근길이면 들러서 채소나 과일을 사곤 했다. 어느 날 저녁거리를 준비하려고 시장 좌판에서 이것저것 둘러보고 있는데, 나이 지긋한 아저씨가 “아줌마, 그것 싸게 줄 테니 다 가져가요”라며 바구니에 가득 담긴 버섯을 가리켰다. 나는 아줌마라는 말에 순간 기분이 나빠져서 사려고 손에 들었던 물건을 내려놓고 “다음에 올게요” 라며 돌아서 버렸다. 


  그깟 호칭이 뭐가 중요하다고 그렇게 발끈했던 것인지. 그때 나는 그렇게 유치하고 속도 좁았다. 한 아이의 엄마로 살아오는 동안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사이 모났던 부분이 조금씩 깎여나가고 옹졸하기 짝이 없던 마음이 조금은 너그러워지기도 하며 사람 냄새가 나게 되었다. 언제부터 내가 스스로를 아줌마로 인정하게 되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여간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으며 어느결에 아줌마 소리에 자연스레 뒤돌아보는 영락없는 진짜 아줌마가 되어버렸다. 아무하고나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어지간한 일에는 눈도 꿈쩍 안 하는 배짱도 생겼다. 물건값 흥정도 능수능란하게 하고, 시시콜콜 지지 않고 따질 줄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다른 이의 아픔에 가슴 아파하며 함께 눈물 콧물 흘리는 주책바가지 아줌마가 되어버렸다. 


  아침에 세수를 하다가 세면대의 거울을 보니 며칠 전에 염색을 했건만 흰머리가 금세 또 올라왔다. 어린아이의 배냇머리처럼 삐죽삐죽 올라오는 흰머리는 침침한 눈에도 잘만 보인다. 돋보기가 없으면 글자 하나도 읽을 수 없는데도 희한하게 흰머리는 금세 찾는다. 언제부터인가 나이를 세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누군가 나이를 물어보면 한참 계산을 해야 한다. 그렇다고 먹을 만큼 먹은 나이를 부정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하루하루 흰머리가 늘어나고 주름도 깊어지지만, 나이 먹어가는 나도 괜찮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얼굴에 주름이 늘어나는 대신 마음의 옹졸했던 주름은 펴지는 일인 것 같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이 흐려지며 오히려 보이게 되고, 순발력이 떨어지면서 오히려 다른 이의 아픔에도 귀 기울이게 되었다.


  또 한 살 나이를 먹는다. 새해에는 부디 살아온 세월만큼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늘어나는 흰머리만큼 아량도 늘어나고, 깊어지는 주름만큼 이해심도 깊어지며 우아하게 조금 더 인간다워지고 싶다. 독선과 아집으로 견고하게 자신의 성을 쌓아 올리는 외로운 어른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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