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냉장고를 비웠는데 내가 보이는 이유

오늘의 [맛] 차림식 : 덜어내니 남은 진짜의 맛

by 차림식



이사 온 뒤 사용하고 있는 빌트인 냉장고는

용량이 작은 편이다.



나름의 기준으로(?) 요리 재료를 소량만 사야 한다.

예를 들면 방울토마토 한 팩, 청경채 셋, 알배추 하나, 무 하나, 당근 다섯, 소고기와 돼지고기 약간에

추가로 아이 간식.

딱 일주일 먹는다 생각하고 구매한다.




부지런히 요리하며 다시 장을 볼 시기를 맞이한 뒤

사둔 재료를 거의 다 소진했겠지 싶어

냉장고를 벌컥 연다.



그렇게 머리를 쥐어짜며 차려먹었는데

냉장고는 한 칸의 여유도 보여주지 않는다.

여전히 넉넉하고 가득 차 보인다.



도대체 이유가 뭔가.

같은 재료로는

더 이상 해 먹을 게 없어 분명히 장을 봐야 하는데,

이 상태로는 새로움을 채워 넣을 수가 없다.



물론 과거의 나는 알고 있다.


엄마가 갑자기 주신 밑반찬,

조금 남았지만 맛이 괜찮아

한 끼는 먹지 않을까 싶어

덜어 둔 찌개,

갑자기 어디선가 등장한 유통기한 5개월 지난 양념들,

손 까딱하기도 귀찮은 날 시켰던

피자배달로 받아둔 소스들.



결국

일부는 강제 수거 처리하고 나서 다시 문을 활짝 연다.

그제야 일주일 전 장 봐둔 재료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어떻게든 소진해야만 한다. 비워야 채운다.



샐러드를 다시 만들까 싶어 재료를 째려보다가

알배추와 당근을 메인으로 두 개의 샐러드를 만든다.


소스는 다시 만들면 또 남길 테니

대충 올리브오일, 소금, 후추, 레몬즙만 뿌린다.


애매하게 남은 무 두 조각은

돼지고기와 생강, 간장, 다시마에 물만 조금 넣고

그냥 졸인다.


청경채는 몇 알 남은 토마토와 달걀을 넣어 볶고,

소고기는 볶아서 밥에 비비고 김밥을 만든다.


모든 간은 간장과 소금으로만 채운다.


우리 집 어린이도 할 수 있을 만큼

신속하고 단순한 조리들,

최대한 덜어내고 비우는 게 목적인 차림식이다.



준비시간 20분, 식사 시간 20분.


정성을 가득 담고

각종 양념들을 계량하며 1시간 만든 차림은

꼭 남아서 냉장고에 다시 들어가는데,


이렇게 뚝딱 만든 식사는

아쉬움도 없이 깔끔하게 뱃속으로 사라진다.



정리된 냉장고에는

여러 맛으로 뒤덮이지 않은 진짜 재료들이 보인다.

단순하게 조리한 식탁에서는

오히려 또렷한 맛이 난다.



사실 재료가 없는 게 아니라

너무 많아서 안 보였던 걸지도 모른다.





문득 느낀다.

비우고 덜어낼수록 진짜가 드러난다.



때로는 꾸밈을 걷고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직시할 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느낄 수 있다.



애써 채우기보다,

이미 가지고 있던 것들 위에 쌓인 먼지를

살짝 걷어냈을 때

그제야 나도 좀 또렷해진다



새로운 것만 찾아

틈 없이 채워 넣던 날 속에

어쩌면 그 넉넉함에 가려진

진짜 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냉장고 정리는 끝냈다.

내일은 거울을 구석구석 들여다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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