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듯 낯선 역사로 보는 현장의 로마

이탈리아에서의 여정 (7) - 역사 수도 로마 관람기 I

by 샤를마뉴

이탈리아에서의 여정이 마지막에 이르렀다.

로마와 바티칸에서 그 마지막을 장식했다.


이탈리아의 경제 수도는 밀라노라고 하지만,

공식 수도이자 역사 수도는 엄연히 로마이다.

로마 없이 이탈리아를 설명할 수 없다.


로마의 후광이 워낙 크기 때문에,

그곳에 있는 유적과 유물은

모두 로마 시대의 것이라고 생각할 만하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로마는 모든 시대의 유산이 남아있는 도시이다.

즉, 살아있는 통사(通史) 도시인 셈이다.


로마를 '살아있는 통사 도시'에 비유한만큼,

문화유산들에 얽힌 통사를 읽어내는 작업은 긴 호흡을 요구한다.

그래서 다섯 편의 글로 나누어

첫 번째, 두 번째 글에서는 '고대'와 '근대'를 중심으로 로마 시내의 유적,

세 번째~다섯 번째 글에서는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를 중심으로

바티칸의 유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로마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을 꼽는다면, 단연 콜로세움(Colosseum)이다.

그 대표성에 걸맞게,

로마에서 가장 먼저 구경한 곳도 콜로세움이었다.

누구나 아는, 그렇지만 직접 보기는 어려운 콜로세움을 보니

카이사르의 유명한 경구가 생각났다.

'Veni Vidi Vici(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필자는 기어이 현실의 벽을 뚫고 로마에 와서 콜로세움을 보았다.


콜로세움은 사진으로 볼 때도,

누구나 '큰 건축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콜로세움을 실물로 볼 때의 느낌은

피렌체에서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과

시뇨리아 광장의 베키오궁을 볼 때 '압도당하는' 느낌과 유사했다.

엄청 크다는 뜻이다.

버스에서 콜로세움을 보여주는 영상, 영상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현지 가이드가 이탈리아 음악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들려준 노래이다.
콜로세움의 모습 (1)
콜로세움의 모습 (2)
콜로세움의 모습 (3)

'콜로세움은 크다.'라는 뻔한 감상평은 짧게 줄이고,

콜로세움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주목하며

역사 이야기를 풀어보겠다.


'Colossal'이라는 영단어를 들어봤는가?

발음에서 알 수 있듯, 콜로세움을 연상케 하는 단어이다.

이 단어의 뜻은 '거대한, 엄청난'이다.


그렇다면 콜로세움의 거대함은

자연스럽게 원형 경기장의 거대함을 뜻하는 것 같다.

놀랍게도 아니다.

거대함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대상은

원형 경기장 옆에 존재했던 네로(로마 제국의 5대 황제,

Nero, 37~68)의 청동상이었다.

그 근거가 되는 단어는 'Colossus'이다.

Colossus는 라틴어로, 거대 조각상을 의미한다.

원형 경기장 옆에 있었던 네로의 청동상 상상도

'콜로세움 = 원형 경기장'이라는 인식이 굳어지기 전,

원형 경기장의 본래 이름에 대해서도 궁금해졌을 것이다.

원형 경기장의 본래 이름은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Amphitheatrum Flavium)으로 알려져 있다.


플라비우스는 로마 제국의 두 번째 왕조였던

플라비우스 왕조(Flavian Dynasty, 69~96)를 의미한다.

앞에서 말한 네로는 아우구스투스가 열어젖힌 첫 번째 왕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Julio-Claudian Dynasty,

B.C 27~A.D 68)의 마지막 황제이다.


역사에서 기존 왕조가 단절되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는

그 사이의 기간에는 높은 확률로 혈투극이 펼쳐졌다.

로마 제국의 첫 번째 왕조가 단절된 직후인 68~69년,

갈바(Galba, B.C 3~A.D 69), 오토(Otho, 32~69),

비텔리우스(Vitellius, 15~69),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9~79),

네 명의 장군이 황제가 되기 위해 격돌했다.


인물의 생몰 연도를 보아 알 수 있듯,

68~69년 혈투극에서의 승자는 베스파시아누스이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두 번째 왕조를 열었다.

그의 재위 시기에 지어진 원형 경기장이

오늘날 콜로세움으로 알려진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이다.

(참고: 배리 스트라우스, 『로마 황제 열전』, 최파일 옮김,

까치글방, 2021, pp.172-173, 188-189)

왼쪽부터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의 모습

즉, 콜로세움은 단순한 원형 경기장이 아니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단절된 이후

자칫 로마 제국이 다시 긴 내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뻔한

불상사를 막고 안정을 지켰다는 '선전 수단'으로도 볼 수 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례가 콘스탄티누스 개선문(Arch of Constantine)이다.

콜로세움 앞에 세워진 이 개선문은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I, 272~337)가 312년 10월 28일,

밀비우스 다리 전투(Battle of the Milvian Bridge)에서

경쟁자 막센티우스(Maxentius, 278(?)~312)를 물리친 것을 기념하여

원로원이 315년에 건립했다.


로마 제국은 일시적으로 '하늘 아래 네 개의 태양'이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244~311)는

제국을 네 영역으로 분할하고,

정제(Augustus)와 부제(Caesar)를 각 2명씩 지명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두정치(Tetrarchia)는

광대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고,

제위 계승 분쟁을 막고자 한 개혁이었다.


그런데 사두정치 체제를 콘스탄티누스 1세가 다시 깨뜨렸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곧 그가 유일 황제임을 선언하는 메시지였다.

그 메시지를 '전례가 되는 선전 수단' 앞에 남겨뒀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개선문 중앙의 라틴어 헌정문
[원문] Imp(eratori) Caes(ari) Fl(avio) Constantino Maximo
P(io) F(elici) Augusto S(enatus) P(opulus) Q(ue) R(omanus)
Quod Instinctu Divinitatis Mentis Magnitudine Cum Exercitu
Suo Tam De Tyranno Quam De Omni Eius Factione Uno Tempore
Iustis Rempublicam Ultus Est Armis Arcum Triumphis Insignem Dicavit
[해석]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플라비우스 콘스탄티누스,
경건하고 복 받은 황제께 신의 영감과 그분의 높은 기백으로
군대를 이끌어 참주(막센티우스)와 그의 모든 당파로부터 국가를 구하셨기에
원로원과 로마 인민은 승리로 장식된 이 개선문을 헌정합니다.

(참고: 박윤덕 외, 『서양사강좌』(개정증보판), 아카넷, 2022, pp.82-84 ;

김덕수, 『그들은 로마를 만들었고, 로마는 역사가 되었다』,

21세기북스, 2021, pp.199-200 >> 필자가 쓴 서평 읽어보기 1, 읽어보기 2)

원로원과 로마 인민의 약자인 S.P.Q.R이 새겨진 콜로세움 주변의 쓰레기통, 로마 시내 곳곳의 쓰레기통, 맨홀 뚜껑에는 S.P.Q.R 문구가 새겨져 있다.

두 번째로 구경한 곳은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o Massimo)였다.

이곳 역시 콜로세움과 맞먹는 규모의 전차 경기장이었다.

그런데 콜로세움의 유명세라는 그늘에 가려진 영향 탓일까?

보존 상태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다.


필자도 여태껏 몰랐던 건축물이었다.

그래서 정보를 조사해보니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로마 공화정 시기부터 이용된 전차 경기장이었고,

제정 시기에는 여러 황제들이 관리 및 복원에 신경을 썼다고 한다.

위상이 상당히 높은 전차 경기장이었다(참고할 글).

키르쿠스 막시무스
키르쿠스 막시무스를 보여주는 영상 (1)
키르쿠스 막시무스를 보여주는 영상 (2)

키르쿠스 막시무스 옆으로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in Cosmedin)이 있다.


이 성당의 이름이 낯설다면,

진실의 입(La Bocca della Verità)은 알 것이다.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의 서쪽 벽에 진실의 입이 있다.


진실의 입에 얽힌 역사는 명확하지 않다.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를 알 수 없다.

우리에게 알려진 진실의 입에 대한 이미지는

그 조각의 구멍 안에 손을 넣고 거짓말을 하면

손이 잘린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뿐이다.

진실의 입

진실의 입이 워낙 유명해서 성당이 가려진 감이 있다.

성당의 역사는 나름 장구하다.

그러나 필자가 종교를 믿는 사람이 아닌지라,

그 역사를 전부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성 발렌티누스(St. Valentinus, 225(?)~270/273)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넘어가겠다.

성 발렌티누스는 3세기 로마에서 활동한 사제이다.

당시 로마에는 루페르칼리아(Lupercalia)라는

풍요와 다산의 신인 루페르쿠스(Lupercus)를 기리는 축제 문화가 있었다.

1635년경에 그려진 루페르칼리아 유화

루페르칼리아는 매년 2월 15일에 거행되었으며,

2월 14일에는 전야제가 열렸다.

전야제에는 특별한 '연애 이벤트'가 있었다.

항아리에 담긴 젊은 여자들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젊은 남자들이 뽑으면,

종이에 적힌 이름의 여자와 종이를 뽑은 남자는

다음 루페르칼리아가 열릴 때까지 연인이 되어야 했다.


한편, 3세기 로마 제국은 고질적인 문제와 씨름하고 있었다.

로마 제국을 팽창하게 만든 핵심 인력인 군인을 충원하기 어려웠다.

이는 트라야누스(로마 제국의 13대 황제, Trajan, 53~117) 재위기 이후

로마 제국의 영토를 넓히지 않으면서 발생한 문제점이었다.


로마 사회에서의 군대는 '신분 상승'의 창구였다.

비천한 출신의 사람일지라도,

군대에서 경력을 쌓으면 인생 역전을 꾀할 수 있었다.


로마 군대에 입대할 매력을 주는 요소는

완전한 시민권의 보장, 좋은 사회적 평판,

전리품을 통한 부의 축적이었다.

그 매력이 만들어지는 원천은

군인들이 능력을 입증하고 경력을 쌓는 '정복 활동'이었다.

그런데 정복 활동이 멈추며, 그 매력을 잃어버렸다.


군 입대자가 줄어드는 문제점이 해결되지 않자,

클라우디우스 2세(Caludius II, 214~270)는

루페르칼리아의 전야제에 칼을 꺼내들었다.

전야제에서 연애 관계를 맺은 남자와 여자의

약혼과 결혼을 금지하는 칙령을 반포했다.


그럼에도 성 발렌티누스는 칙령을 무시하고 계속 청년들의 결혼을 주선했다.

결국 그는 루페르쿠스 전야제 날에 처형당했다.

이후 발렌티누스는 그리스도교의 성인(聖人)으로 인정되어

그가 처형당한 2월 14일은 성 발렌티누스의 축일이자,

초콜릿을 주고받는 발렌타인데이가 되었다.

(참고: 유희수, 『낯선 중세』 , 문학과지성사, 2018, p.286)


로마 가톨릭교회의 관행 중 하나는

성인의 유골을 성당에 안치하는 것이다.

성 발렌티누스 역시 그 관행이 적용되는 대상이 되었으며,

그의 유골은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에 모셔져 있다.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 내부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 내부의 예수 초상화(왼쪽)와 세례반(오른쪽)
성 발렌티누스의 유골이 든 유골함

다음 글에서 로마 시내의 유적을 계속 살펴보겠다.

이전 16화지중해가 만든 천국, 소렌토와 카프리 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