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불완전성: 일상과 역사의 연결

교육으로 가는 역사학 내비게이션 1장

by 샤를마뉴

이 장에서는 역사의 불완전성과 교육의 접목을 논의한다. 역사를 깊이 있게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교과서나 책에 기록된 역사를 '완전한 사실'로 받아들이기 마련이다. 역사를 사실 나열의 대상으로 볼 때 생기는 현상이다. 초중등 교육 현장에서 '역사를 잘한다.'의 기준은 교과서에 나온 역사적 사실을 철저히 외우고 시험을 잘 보는 것이다. 무언가를 암기하는 능력 = 역사를 이해하는 능력으로 보고 있다. 그러다가 대학에 와서 역사를 배우면 충격을 받는다. '내가 생각한 역사는 이런 게 아닌데...'라면서 말이다. 이 괴리가 빚어지는 원인은 무엇일까? 교육 현장에서 역사의 불완전성을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역사의 불완전성을 알려주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그렇지 못하는 걸수도 있다.

역사의 불완전성은 역사 공부에 대한 경고 문구(Disclaimer)가 되어야 한다. 역사 공부를 하려는 사람에게 '내가 지금 책에서 배우는 역사가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라는 말을 건넸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그 사람은 의문을 가지게 된다. '왜 진실이 아니에요?'라고. 그렇게 역사라는 대상에 대한 청문회가 시작된다. 질문에 질문이 거듭되면서, 그 사람은 역사가 책에 기록된 하나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역사를 사실 나열의 대상에서만 보는 걸 탈피하게 된다. 이처럼 역사의 불완전성에 대한 이해는 역사와 대화하는 첫걸음이다. 모르는 게 있으면 질문을 해서 추가적인 답변을 들어야 이해가 되듯이, 역사도 그러한 대상이다. 역사는 완전하지 않다. 그래서 '불완전하다.'라는 경고를 해야 한다.

초중등 역사교육에서 역사의 불완전성을 어떻게 알려주고 이해시켜야 할까? 이 질문이 역사의 불완전성과 교육을 접목하는 핵심이다. 초중등 역사교육은 역사를 아예 모르는 학생들도 교육 대상에 두므로, '지식 습득'을 역사교육의 일차적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은 맞다. 그렇다면 이 일차적 목표가 어느 정도 달성되었을 때, '역사에 질문을 던지는' 역사의 불완전성을 이해시킬 수는 없을까? 슬프게도 이 고민을 현실로 이루기에는 장벽이 있다. 학교 현장이 역사적 사실이 진실인지, 이견은 없는지 등을 논할 만한, 여유로운 공간이 아니라는 점이 그렇다. 대학 이상의 교육 기관에서 역사를 다룰 때는 사료를 비판적으로 검증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여, 어떤 사건의 연구사(연구자들이 어떤 사건을 연구하여 의견을 도출한 역사), 연구자들의 다양한 의견 및 쟁점을 비교하는 복잡다단한 과정을 요구한다. 이를 초중등 역사교육에서 그대로 실행에 옮기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역사라 일컫기 가장 쉬운 요소에서 불완전성을 이해시켜야 한다. '일상'이 그 예시이다. 아래에서 역사의 불완전성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이를 어떻게 학생의 눈높이에서 교육할 수 있는지를 짚어보겠다.


1. 왜 역사는 불완전한가?

필자도 역사를 사실 나열의 대상으로 보던 한 사람이었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교과서에 나온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고, 시험을 잘 보면 '역사를 잘한다.'라고 착각했었다. 그 시절부터 역사를 해석의 대상으로 이해하려면 스스로 꾸준히 역사 관련 서적을 읽고, 역사를 소재로 하는 사고력, 문장력 향상 활동을 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때의 필자는 독서하는 습관이 없었고, 학교에서 '제대로 된' 역사 관련 비교과 활동을 해보지 못했다. 그런 상태로 사학과에 진학했으니, 역사에 대한 단편적인 인식이 깨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떤 사건에 대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첫 전공 수업(<서양사입문>), 긴 호흡의 글을 읊어야 하는 시험 방식에서 내가 알던 역사가 아니라는 인상을 처음 받았다. 역사를 사실 나열의 대상으로만 봤을 때는 사학과의 수업을 따라갈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역사학 자체를 이해하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렸다. 1학년 2학기 때 들었던 <역사학입문> 수업은 심오함 그 자체였다. 처음 들어보는 서양 역사가, 연구자들의 주장, 각종 역사이론, 역사와 인접 학문의 관계 등 굉장히 방대하고도 심오한 개념들이 수업에서 흘러나왔다. 과제는 영문 사료의 출처(진위), 특징 등을 다각도로 분석하는 것이었다. 쉽지 않았지만, 배워가는 게 확실했다. 사학과에서 들은 수업 중 몇 안 되는 '제대로 된 수업'이었다. 그럼에도 역사학 자체가 무엇인지를 정의 내리기는 어려웠다. 역사학과 관련한 여러 요소를 배웠지만, 역사학의 전체적인 상을 그리려면 경험이 더 필요하였다.

사료를 다루는 경험은 역사학의 특성을 내면화하는 계기였다. 2학년 때 들었던 <영문사료강독>, <한문사료강독> 수업은 각각 영문, 한문 사료를 직접 학생들이 번역하고 발표하는 강의였다. 기억에 남는 내용은 <한문사료강독>에서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 기사를 다룬 것이었다. 이 기사는 학계에서 쟁점이 되는 주제인데, 그 이유는 금석문에 새겨진 일부 한자가 마모되었기 때문이다. 마모된 한자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사료의 의미는 크게 달라지게 된다. 여기서 필자는 역사의 불완전성을 제대로 깨달았다. 역사적 사실을 구성하는 기록에서 일부분이 훼손되면, 그 빈 부분을 어떻게 추측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역사적 사실이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걸 알았다. 사료를 강독하는 강의 역시 따라가기 쉽지 않았지만, 역사학의 전체적인 상을 그리게 해주는 '숙련된 경험'이었다.

이상에서 설명한 필자의 역사 공부 경험에서 역사의 불완전성이 무엇인지를 알았을 것이다. 역사의 불완전성을 쉽게 비유하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과거를 온전한 사실로 믿으려면, 과거의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일을 '두 눈으로' 목격하여야 한다. 그런데 시간은 지나가면 돌이키지 못한다. 인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흘러가는 1초의 시간마저 통제할 수 없다. 공간도 시간에 따라 변하면 되돌리지 못한다. 이렇듯 인간은 과거를 지배하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은 지나간 과거를 기억으로 재현하기 위해 '기록'이라는 방법을 택하게 되고, 역사에서는 '사료'가 된다. 하지만 기록에도 한계가 있다. 세상에서 펼쳐지는 모든 일을 일일이 기록하는 게 아닌, 기억될 만한 일을 선별해서 기록한다는 점이 그렇다. 따라서 일반적으로는 책, 전문적으로는 사료로 보는 역사라는 과거는 '선별된 기억'이다. 선별되지 않은 기억은 그대로 잊혀진다. 선별된 기억마저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지거나 훼손되는 경우가 있다. 그렇기에 역사가는 신중하면서 엄정한 태도를 가지고 과거를 '그나마 객관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골몰하고, 어느 정도의 합의가 됐을 때 이론을 내놓는다. 역사가도 불완전 속에서 완전을 고민한다. 곧 역사가 불완전하다는 증거이다.

인간이 시간 앞에서 무력한 것은 역사의 불완전성을 강화한다. 기록할 대상을 선별하고 기록하는 행위는 전적으로 당대인의 기준에 따른다. 기록할 대상의 선별은 곧, 당대인이 '지금 이 순간 살아가는 시점'에서 '접하는 모든 것들' 중 중요도를 각각 따지고 기록의 유무를 결정하는 행위이다. 이는 당대에는 큰 문제가 없다. 한 당대인이 기록할 대상을 선별하는 기준은, '같은 당대의 시간, 공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다른 당대인들도 대체로 동의할 가능성이 높다. 혹은 다른 당대인이 한 당대인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선별 기준을 재정의하더라도, 이전의 한 당대인이 정한 기준과 비슷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시간이 흐른 후이다. 시간이 흘러 새로운 당대인, 새로운 시간, 새로운 공간, 새로운 사회가 구성되면 더 이상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후대인이 선대인의 모습, 선대인들이 살아간 세상을 알고 싶다면, 그들이 남긴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때 선대인이 당대에 중요하지 않다며 선별하지 않은 기억이, 후대인이 선대인의 세상을 완전히 재현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였다면 어떨까? 이것이 곧 시간에 의한 역사의 불완전성이다.

역사의 불완전성은 '기록 주체'의 차이로 나타나기도 한다. 뉴스에 보도되는 내용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주제는 무엇일까? 대개 유명인사의 이야기이다. 얼마 전 내려진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 선고는 대다수 국민의 관심을 받는 주제였지 않던가. 어떤 동네에 사는 평범한 아무개의 일상에 한 명이라도 주목하면 많은 관심을 받는 것이다. 기록하는 사람, 혹은 기록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역사에 남겨지는 자취가 달라진다. 그 말은,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 오랜 시간 사회적 약자로 취급받은 여성의 역사 등을 자세히 알기 힘들다는 뜻이기도 하다. 평범한 사람이 직접 기록한 평범한 사람의 역사, 여성이 직접 기록한 여성의 역사가 전승되는 사례는 열 손가락 안에 들지도 못할 것이다. 이것이 기록하는 사람, 기록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역사의 상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하는 역사는 '큰 차원의 역사(거시사)'이다.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파장을 불러일으킨 사건, 유명인사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역사인 셈이다. 결국 '두드러져야' 역사가 된다. 두드러지지 않는 것(평범한 것)은 역사에서 사라진다.

역사의 불완전성을 이해하면 더 이상 역사를 수동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 역사를 단순히 '지나간 옛날의 이야기'로 치부하면 안 되는 근거이기도 하다. 지나간 옛날에서 아쉬운 것, 후회되는 것이 있듯이 역사에도 '미처 기록되거나 전달되지 못한 것'들이 수두룩하다. 역사학은 불완전한 과거를 조금이나마 더 완전하게 재현하는 학문이다. 불완전한 과거에 있는 많은 공백을 '합리적인 추측'으로만 채워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학문으로서의 역사는 심오하고 어렵다. 역사의 불완전성을 '학문적으로 다루는 방식'은 초중등 역사교육에서 가르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 '많은 질문을 요구하는' 역사의 불완전성은 어쩌면, 번번이 질문을 던지기 마련인 어린 아이들에게 흥미를 끌 수 있는 요소일 수 있다. 역사의 불완전성이 아이에게 흥미를 끄는 요소인 게 사실이라면, 사실 나열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진부한 역사교육의 틀에서 벗어나는 하나의 단초가 된다. 단, 아이의 눈높이에서 쉽게 이해하는 '역사의 불완전성 체험 교수법' 같은 전제가 필요하다. 그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2. 일상에서 깨닫는 역사의 불완전성

일상을 역사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게 한 방법이겠다. 가장 쉬운 방법은 일기를 쓰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역사의 불완전성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기는 하루를 되짚어보는 기록이다. 기록의 대상이 되는 '하루'라는 대전제 안에는 '하루 속에 펼쳐지는 여러 이야기'라는 소전제가 포함된다. 이 소전제의 전체를 시간적으로 풀이하면 '아침에 일어난 뒤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기 위해 잠드는 순간'까지이다. 그렇다면 일기를 쓰는 사람들은 소전제의 전체를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할까? 그렇지 않다. 소전제의 전체를 모두 기록하려면, 일기를 쓰는 사람의 기억력이 초인적이어야 되고 긴 분량의 글을 막힘없이 써내야 한다. 하지만 이를 해내는 사람은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소전제를 기록할 필요가 없음을 알고 있다. 기록의 선결 조건이 '기록할 대상의 선별'임을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전제로 깔고 가는 것이다. 일기로 일상을 기록하는 행위와 학자 혹은 국가 차원에서 역사서를 기록하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기록할 대상을 선별하고 기록한다는 점'에서 같다.

기록 주체의 차이에 따른 역사의 불완전성을 이해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이 역시 일상을 역사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면 쉽게 이해 가능하다. 다시 일기를 쓰는 행위를 짚어보자. 표절을 하지 않는 이상, 사람들이 쓴 일기의 내용은 제각기 다르다. 일기를 쓰는 사람들의 특성이 전부 다르기 때문이다. 두 사람(A, B)이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같은 기억을 남겨주는 하루를 보내고 일기를 쓰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그러면 두 사람이 각각 쓴 일기에는 '같은 기억을 남겨준 이야기'를 공통적으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다. 한 가지의 조건을 더 가정하겠다. 두 사람의 문체는 제각기 다른데, A는 자신의 감정을 상세히 서술하는 문체를 가졌고, B는 경험한 일만을 간략히 쓰는 문체를 가졌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문체를 가진 상황에서 같은 기억을 남겨준 이야기를 기록하면, 그 일기의 전체적인 모습은 같을까? 분명히 다르다. A의 일기는 어떤 경험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피력하였기에, '어떤 경험에 대한 사람의 내면'에 주목하며 읽힐 것이고, B의 일기는 어떤 경험을 간략히 기록하였기에, '어떤 경험의 객관성'에 주목하며 읽힐 것이다. 결국 사실은 모두에게 동등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사실을 접한 사람의 특성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그것이 곧 기록 주체의 차이에 따른 역사의 불완전성이다.

어른이 되어 어린 시절의 사진, 어린 시절에 쓴 글 등을 보면 '내가 이랬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한 사람'이라는 개체는 계속 존재하지만, 개체의 신체 및 정신적 특성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리고 이 현상을 만든 주범은 시간이다. 시간이 흐르며 사람은 변한다. 그 과정에서 생생한 당대의 기억이 과거가 되어 흐릿해지고, 또 다른 생생한 당대의 기억이 만들어지는 연쇄적 변화가 거듭된다. 한 사람의 인생만 해도 모든 기억을 온전히 재현해내기 어렵다. 그런데 수백, 수천년 전의 역사는 어떻겠는가? 아이에게 지금 살아가는 순간을 일기든, 사진이든 기록으로 남기게 하고, 어른이 되어 다시 보게 해보자. 그러면 어른이 된 아이는, 아이였을 때의 그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할까?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몇 개의 잔상으로 과거가 이랬을 거라 짐작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시간에 의한 역사의 불완전성을 체험할 수 있다.

이처럼 역사의 불완전성을 알려주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일상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행위만으로도 충분히 이를 깨달을 수 있다. 이 깨달음으로 역사를 사실 나열의 대상으로 보는 게 아닌,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하는 대상으로 보게끔 해야 한다. 책에 기록된 역사를 알려주기 전에, 일상에서 역사를 찾아야 한다. 역사교육의 시작이자 근본은 어쩌면 일상을 역사의 영역으로 이끄는 교육이 아닐까?


3. 나가며

이 장에서는 역사의 불완전성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그 원리를 터득하는 방법을 일상을 역사의 영역으로 이끄는 교육으로 제시해보았다. 역사가 불완전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기록의 선결 조건이 기록할 대상의 선별인 점, 남아있는 기록도 기록의 보존 정도, 기록 주체의 차이에 따라 재현되는 역사의 상이 달라질 수 있는 점, 인간은 시간을 통제할 수 없는 점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단순히 사실 나열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현재의 역사교육은 역사에 질문을 던지는 교육은 아닌 것 같다. 허나 무작정 '기초적인 역사 지식의 습득'이라는 목표를 허물고 '역사학의 본질을 이해하는 교육'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실현하는 것은 이상론이다. 그래서 필자는 '일상을 역사의 영역으로 이끄는 교육'을 역사의 불완전성을 쉽게 이해하고, '역사학의 본질을 이해하는 교육'이라는 목표를 현실화하는 지침으로 제시하였다. 그저 단편적인 일상을 되짚는 일기를 써보고, 같은 공간, 사람을 제각기 다른 시간에 사진으로 남겨보는 등의 행위만으로도 아이에게 역사의 불완전성을 깨닫게 하기 충분하다. 교육자들은 이를 유도하는 중계자의 역할만 수행하면 된다. 이런 교육 방식이 가장 쉬우면서도 역사학의 본질에 눈을 뜨는 데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한다. 이 장에서 역사학 내비게이션은 '역사의 불완전성'을 안내하여 일상과 역사를 연결하는 교육으로 이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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