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굴 제국의 역사』세부 내용 소개 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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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 내용 소개
무굴 제국이 인도사에 큰 의미를 갖는 이유는 '융성한 문화'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크바르는 1571년에 파테푸르시크리(Fatehpur Sikri)라는 수도를 건설한 뒤, 그곳에서 여러 종교학자와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는 '학식을 갖춘 지도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후의 황제들도 문화에 관심을 가졌으며, 웅장한 건축물로 그것을 나타냈습니다. 특히 5대 황제 샤자한은 건축 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하였고, 인도를 영원히 대표하는 문화유산인 타지마할을 남겼습니다. 이렇게 무굴 제국은 하드파워뿐만 아니라 소프트파워까지 갖추게 되었습니다.
무굴 제국의 문화는 이슬람-힌두 문화로도 불립니다. 외래 문화(이슬람)와 고전 문화(힌두)가 융합된 것이 특징인 이 문화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미(美)를 자랑했습니다. 여기에서는 건축물을 중심으로 그 실제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슬람 그리고 힌두 문화에는 뚜렷한 건축적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슬람 문화에서는 돔, 미너렛(첨탑), 아라베스크 양식(기하학적 문양 장식), 힌두 문화에서는 연꽃무늬 장식, 차도리(건축물 상단에 설치한 작은 탑)의 건축 양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굴 제국에서는 두 문화의 건축 양식을 합한 건축물이 지어졌습니다. 아래 사진에서 그것이 어떻게 적용됐는지 확인해보시길 바랍니다.
무굴 제국 황제들의 재위 기간은 대체로 길었습니다. 긴 치세의 지도자가 명군이냐, 암군이냐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극명하게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다행히 무굴 제국은 전자에 해당됐습니다. 『무굴 제국의 역사』7~9장은 자한기르(Jahangir, 4대 황제), 샤자한(Shah Jahan, 5대 황제), 아우랑제브(Aurangzeb, 6대 황제)의 치세를 다루고 있습니다. 세 황제의 재위 기간은 합쳐서 100여 년입니다. 아크바르의 치세까지 합하면 150년이 넘습니다. 이 시기의 무굴 제국은 서아시아의 오스만 제국, 중국의 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강대국 반열에 들었습니다.
국가가 안정을 이룩하면, 그때부터는 '현상 유지'가 관건이 됩니다. 자한기르는 아크바르의 정책을 계승했습니다. 여러 종교를 포용하는 기조도 유지했고, 예술을 적극적으로 후원했습니다. 다만, 그는 술과 마약(아편)을 탐닉했다는 결점이 있습니다(책의 pp.268, 285). 지도자가 건강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는 건 분명히 부정적으로 평가받을 여지가 있죠. 그렇다고 그 영향으로 제국을 한순간에 위험하게 만드는 실정을 범하지는 않았습니다. 무굴 제국의 안정은 그의 사후에도 지속됐습니다. 본래 공인은 열 가지 일을 잘해도, 한 가지 일을 잘못하면 이미지가 실추되기 마련인데, 자한기르도 그 경우로 보면 되겠습니다.
[황제 재위 기간 참고하기]
- 아크바르: 1556~1605, 자한기르: 1605~1627, 샤자한: 1628~1658, 아우랑제브: 1658~1707
샤자한과 아우랑제브는 무굴 제국의 위엄을 과시했습니다. 샤자한은 아름답고 웅장한 건축물로, 아우랑제브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위엄을 보여주었습니다. 두 황제의 행보는 국가가 안정을 넘어 절정기에 이를 때 재위하는 지도자의 전형입니다.
[샤자한과 아우랑제브를 찬양하는 기록]
태양처럼 빛나는 황제(샤자한)의 정신은 이 높고 거대한 건물의 설계와 건설에 전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 건물들은 앞으로 오랜 세월 건설과 장식,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변치 않는 사랑을 기념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이렇듯 많은 제왕과 전투를 치르고 또 군주들과 교전하고 즉위한 제왕은 거의 없었는데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분(아우랑제브)께서는 강한 팔과 날카로운 검으로 모든 곳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분의 겸손은 너무 커서 이 승리들을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행한 기적이라고 말씀하시고 …(중략)… 단 한 순간도 몸을 쉬거나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 마이클 피셔,『무굴 제국의 역사』, 최하늘 옮김, 이옥순 감수, 더숲, 2025, pp.309, 328.
국가가 절정기에 이르면, 애석하게도 쇠퇴의 내리막길을 걷게 됩니다. 샤자한-아우랑제브 재위기의 무굴 제국은 절정기에 이르렀지만, 동시에 쇠퇴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이 시기 무굴 제국은 경제적, 종교적으로 불안정성이 심화됩니다. 샤자한이 추진한 대규모 건축 사업은 공공 지출이 수입을 상회해 적자 상태를 유발시켰습니다. 샤자한의 뒤를 이은 아우랑제브는 제국의 경제적 적자를 수습하기 위해 긴축 정책을 펼쳤습니다. 화려함을 과시하는 건축 사업을 지양하고, 스스로도 엄격히 검약을 실천했습니다. 대표적으로 그의 재위기에 지어진 비비 카 마크바라(위 사진 참고)가 타지마할과 형태는 유사하지만 덜 화려하다는 점에서 긴축 정책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우랑제브의 명령]
샤자한의 재위 이후 공공 지출은 수입을 1,400만 루피나 초과했다. 황제의 개인 수입은 4,000만 루피로 고정하고 지출도 같아야 한다고 정해졌다. 지출 내역을 살펴본 후 폐하께서는 황제와 왕자, 베김들의 지출 항목 가운데 많은 항목을 삭제했다.
- 위의 책, p.339.
아우랑제브는 독실한 무슬림이었습니다. 개인이 어떤 종교의 독실한 신자인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국가를 이끄는 지도자의 위치에서 자신이 믿는 종교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면 문제가 됩니다. 그는 이슬람 제일주의를 내세워 아크바르가 폐지했던 지즈야를 다시 징수했습니다. 비이슬람교도의 입장에서는 본래 안 내도 됐던 세금을 다시 내는 것이니 강력한 반발이 발생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종교적 관용은 인도의 다양한 공동체를 통합시켜 무굴 제국을 번영의 길로 나아가게 만든 '원칙'이었습니다. 아우랑제브는 이 원칙을 깨뜨렸고, 그 순간부터 무굴 제국은 불안정의 광풍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시크교 세력, 마라타인 등이 조직적인 저항을 전개했으며, 특히 시바지 본슬레가 건국한 마라타 제국은 인도의 북부와 중부를 지배해 무굴 제국의 통치력을 약화시켰습니다.
제국에 조직적으로 저항하는 움직임이 생기면서, 아우랑제브는 그것을 제압하는 데 일평생을 보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무굴 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넓히기도 했지만, 득(得)보다는 실(失)이 컸습니다. 잦은 대외 원정으로 경제적 문제가 심화되고, 그의 사후 제국의 통치력은 유명무실해졌습니다. 비록 아우랑제브가 무굴 제국이 쇠퇴하는 실마리를 제공했지만, 그 자체는 능력 있는 지도자였습니다. 49년을 황제로 재위하면서 수많은 종교 세력의 저항을 제압하고, 죽을 때까지 전장을 지키는 건 아무나 하지 못할 일입니다. 그가 죽을 때의 나이가 아흔이었고, 그때까지도 전장에 출두했습니다. 문제는 아우랑제브 이후의 황제들은 그만한 군사적 재능과 건강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반면, 각지의 토호 세력은 강성했습니다. 그래서 무굴 제국의 생명은 아우랑제브가 사망하는 1707년에 끝났다는 견해도 존재합니다(책의 p.366).
국가의 급속한 쇠퇴는 대개 빠른 멸망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무굴 제국은 아우랑제브 사후에도 150년은 존속했습니다. 각지의 토호 세력, 인도를 서서히 침범하기 시작한 영국이 무굴 제국의 '외형적 존재'만큼은 인정했기 때문입니다(책의 p.365). 제국의 이름만 유지하고 실권은 다른 세력의 수중에 있는 이 상황은 마치 유럽의 신성 로마 제국(962~1806)을 떠올리게 합니다. 신성 로마 제국 또한, 황제는 명목상의 지위에 불과하고 실권은 각지의 제후에게 있는 유명무실의 상태가 오래 이어졌습니다.
아우랑제브 이후 재위한 황제들은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기지도, 중흥을 이룩하지도 못했습니다. 위 계보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짧은 기간에 황제가 여러 번 교체되는 상황(1712년과 1719년)이 발생하기도 했고, 오래 재위한 황제도 특출난 통치력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샤 알람 2세(Shah Alam II, 1728~1806), 악바르 2세(Akbar II, 1760~1837), 바하두르 샤 2세(Bahadur Shah II, 1775~1862)가 그 경우입니다. 1757년, 영국은 프랑스와의 플라시 전투에서 승리하여 인도에 대한 독점적인 지배권을 확립했습니다. 이때부터 영국은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를 앞세워 무굴 제국의 황제를 좌지우지했습니다. 자주적인 황제권 행사는 불가능했습니다. 최후의 세 황제는 모두 노인이었는데, 이것이 제국의 운명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인도인의 입장에서는 제아무리 무굴 제국이 쇠퇴했더라도, 외세에 의한 노골적인 통치를 용인하진 못했을 겁니다. 1857년, 영국 동인도회사에 고용된 인도인 용병인 세포이를 중심으로, 영국의 지배에 저항하는 봉기가 발생했습니다(세포이의 항쟁). 이때 무굴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바하두르 샤 2세가 민족적 결집력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본래 바하두르 샤 2세는 그 어떤 정치에도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는데, 세포이의 항쟁을 통해 민족 운동의 상징으로 변모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포이의 항쟁은 실패로 끝났고, 외형적으로나마 존속했던 무굴 제국의 수명도 다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해체하고, 인도를 직접 지배하는 방침을 수립했습니다. 그렇게 인도는 1947년에 독립할 때까지, 90년간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습니다.
이렇듯 무굴 제국의 역사는 각양각색의 형상을 띄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굴 제국의 역사를 연구하는 방법도 다양하고, 역사를 평가하는 인식 또한 엇갈립니다. 『무굴 제국의 역사』11장에서는 시대별, 지역별, 학자별로 무굴 제국에 관한 역사적 평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10장에 걸쳐 개관한 무굴 제국의 역사적 흐름을 살펴본 뒤 이 장을 읽었을 때, 저자가 서문에서 언급한 '무굴 제국에 관한 관심은 가히 세계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만 관심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 우리나라 역사교육이 다양한 색을 지니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쓰는 과정은 큰 시험과도 같았습니다. 역사를 전공하는 사람의 입장, 역사를 교육하는 사람의 입장 모두를 치밀히 고려해야 됐기 때문입니다. 전자의 입장에서는 낯선 인도사를 '유연하고 깊이 있게 풀어내는 방법'을, 후자의 입장에서는 '어떤 사람이 읽어도 쉽게 이해하는 서술 방법'을 동시에 고민하며 글을 썼습니다. 그 고민 끝에 내놓은 『무굴 제국의 역사』에 관한 4편의 서평이 역사학 그리고 역사교육에 하나의 색깔을 더하는 초석이 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