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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우주처럼 펼쳐지는 대영박물관

영국에서의 여정 (3) - 정신없었던 대영박물관 관람기

by 샤를마뉴

영국 런던에서의 둘째 날이 밝았다.

기상 시간은 오전 6시 20분쯤이었다.

필자는 아침형 인간이 아닌지라, 평소라면 그 시간에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여행은 의도치 않게 필자를 '건강한 아침형 인간'으로 만들어줬다.


묵었던 숙소는 Hilton T5 Hotel이라는 4성급 호텔이었다.

여행 막바지에 접어들수록 그 호텔이 그리워졌다.

10박 11일의 유럽여행 기간에 둘러볼 국가는

영국을 비롯해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까지 네 국가였다.

그러므로 숙소를 여러 번 바꿔야 됐다.

이탈리아의 로마에 이르기까지는 하루마다 숙소가 바뀌었는데,

이 영국의 좋은 숙소도 단 하룻밤만 머물러야 했다.

안타깝게도 이후의 숙소들은 영국의 숙소를 능가하지 못했다.


4성급 호텔의 이름값을 하는지, 시설도 깨끗했고 조식의 수준도 높았다.

평소의 필자는 아침밥을 안 먹고(그 시간에 잠을 더 잔다.),

먹더라도 입맛이 없어 식사량이 많지 않다.

그런데 그 호텔의 조식은 '하나라도 더 챙겨먹어야 할 정도로' 맛있었다.

몇 안 되는 아침밥을 배불리 먹은 경험이었다.

Hilton T5 Hotel의 조식, 왼쪽은 잉글리시 브렉퍼스트(English Breakfast)의 메뉴인 계란후라이, 베이컨, 토마토, 해쉬브라운이고, 오른쪽은 각종 빵들이다.
조식 때 제공하는 음료도 다양했는데, 왼쪽부터 오렌지주스, 사과주스, 베리주스, 물이다. 오른쪽은 0층 로비에서 찍은 반지, 목걸이 컬렉션으로, 서양 배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조식을 먹은 뒤, 짐을 싸고 고급진 호텔과 작별했다.

버스를 타고 1시간 동안, 전날 봤던 런던의 풍경을 '똑같이' 구경했다.

호텔이 히스로 공항 옆에 있어서, 런던 시내로 이동하는 경로가 전날과 똑같았다.

한 가지 차이점이라면, 시간이다.

전날 오후에 런던 시내로 진입할 때도 교통체증이 조금 있었는데,

이날은 평일 아침인지라 출근길로 교통체증이 더 심했다.


평일 아침의 런던 풍경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버스 너머로 영업을 준비하는 상점, 일과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한국에서도 흔한 광경이다.

아침의 런던 풍경을 보여주는 영상
일본 만화/애니메이션 피규어를 파는 상점(왼쪽)과 빨간색 공중전화 부스 뒤로 있는 잡화점(오른쪽)

영국 런던에서의 둘째 날이자 마지막 날의 주요 일정은

대영박물관(영국박물관, The British Museum) 관람이었다.

이름만 들었던 대영박물관을 직접 보게 된다니 기대되었다.

특히 역사를 전공하는 필자에게는 기대감이 더욱 컸다.


요즘은 한국에서도 세계 각국의 유물을 구경할 기회가 늘어났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은 세계사 또는 세계 문화를 주제로

특별 전시회를 꾸준히 개최하는 중이다.

특별 전시회를 구경하려는 수요도 높고, 필자 또한 그 수요에 기여하고 있다.


이렇게 높은 수요를 보이는 것은

세계사, 세계 문화의 매력이 독보적이다는 뜻이기도 하다.

중등(중학교, 고등학교) 및 고등(대학교) 교육에서 세계사는 박대받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대중을 상대로 하는 교양교육(혹은 콘텐츠)에서 세계사는 나름 인기의 대상이다.

평가를 수반한 교육(중등, 고등교육)에서는 부담으로 작용하는 세계사의 방대함이,

평가를 수반하지 않는 교육(교양교육)에서는 끝없는 새로움, 흥미라는 장점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2010년대까지는 세계사, 세계 문화를 주제로 개최한

행사들의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았던 것 같다.

언론에서도, SNS에서도 그런 행사를 적극적으로 홍보한 걸 본 기억이 없다.

반면, 2020년대부터는 방송 프로그램, SNS, 박물관의 운영 전략 변화 등의 요인으로

세계사, 세계 문화에 관심을 갖는 분위기가 차츰 형성되는 중이다.

이것은 세계사, 세계 문화가 '교양 있는 사람들만' 향유하는 대상에서

'모두'가 향유하는 대상으로 바뀌어가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중등, 고등교육이 그 흐름에 역행하고 있으니 한탄스러울 따름이다.


필자의 평소 문제의식이기도 한 위의 내용을 얘기한 이유는

대영박물관 관람이 곧 필자의 '오랜 갈증'을 해소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세계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놓인 교육적 현실이 썩 좋지는 않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고등학교와 대학교 모두에서 그 척박함을 동시에 느꼈다.

그렇게 답답한 감정을 안고 살다가,

대영박물관을 두 눈으로 구경했을 때 탄식이 나오며 답답함이 풀렸다.

이상이 현실로 온전히 펼쳐진 모습을 보니 그런 것이다.


하지만 대영박물관 관람에 대한 너무 큰 기대를 가질 필요도 없다.

대영박물관을 관람하기 직전까지 극에 달했던 설렘은

관람을 마치고 나서 아쉬움으로 변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대영박물관의 규모가 너무나 방대하다.

성채를 연상케 할 정도로, 건물들도 많고 크기 또한 크다.

소장하고 있는 유물은 자그마치 800만 점에 달한다.

현지 가이드가 말하기를, 대영박물관을 완벽하게 관람하려면

한 달 또는 그 이상의 시간을 '온종일' 봐야 한다고 했다.

보통 사람들에게 적당한 박물관 관람 시간은 길어봐야 1~2시간인데,

어떻게 한 달 내내 박물관을 관람할 수 있겠는가.

(역사 전공자에게도 그건 쉽지 않은 일이다.)

위성 사진으로 본 대영박물관의 규모(구글 지도)

둘째, 관람객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다.

세계적으로 명성이 난 박물관이다보니, 당연히 관람객도 세계 각지에서 온다.

로제타석처럼 인지도가 높은 유물 앞에서는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유럽에서는 소매치기를 특히 조심해야 되는데,

소매치기가 수확을 얻는(도둑질하는) 최적의 장소가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다.

당연히 대영박물관도 소매치기가 활동하기 좋은 장소이다.

박물관 곳곳에 경호 인력이 있지만, 소매치기로 인한 소지품 도난은 책임지지 않는다.


셋째, 단체 관람으로는 별로인 장소이다.

괜히 '별로'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게 아니다.

단체로 관람할 때는 집단을 통솔할 수 있어야 된다.

그렇게 되면 개인 행동을 하지 못하는 제약이 발생한다.

그 제약이 '시간을 두고' 봐야 하는 박물관 관람의 원칙과 충돌한다.

어떤 유물인지, 유물의 특징은 무엇인지를 곰곰히 생각할 틈도 없이,

유물의 대략적인 인상만 보고 휙휙 넘어가야 한다.

그래서 대영박물관은 개인 관람 혹은 자유 관람으로 편히 보는 게 좋다.


또 하나의 이유가 있는데, 이건 후술하겠다.

결론적으로 대영박물관을 구경한 것은 좋았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었다.


앞에서 말한 문제점 때문에,

정말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유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사진 또는 동영상으로 온전히 담아낼 수가 없었다.

본 것도 극히 일부였다.

이집트와 고대 그리스의 유물들을 주로 봤고, 그 외 국가/문화권의 유물은 거의 보지 못했다.


필자는 유럽여행을 떠나기 1주 전에,

대영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을 이해하기 위한 사전 지식을 갖추기 위해

『대영박물관』(루카 모자티, 최병진 옮김, 마로니에북스, 2007.) 책을 사서 읽었다.

책에는 이집트, 그리스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인도, 중앙아시아/서아시아, 북유럽, 남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국가/문화권의 유물이 소개되어 있다.

그 사실을 모르고 관람했다면 '많이 봤네~'라고 만족했겠지만,

알고 나서 관람했으니 '보지 못한 게 이렇게나 많다니!'라며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대영박물관을 직접 갔다는 의의가 크므로,

부족하게나마 이집트/고대 그리스 유물과 지나치듯 본 그 외의 유물을

현지 가이드로부터 들었던 내용, 『대영박물관』의 내용을 덧붙여 소개하겠다.

그런데 유물에 대한 설명을 하나하나 자세히 하기엔 글이 너무 길어진다.

그래서 사진 밑의 캡션을 다는 방식으로 설명을 축약할 테니,

독자 여러분은 정말 박물관에 왔다 생각하고 조용히 유물들을 감상해보길 바란다.


[지금부터 감상 시간]

중국 수나라의 불상(왼쪽)과 한국관의 불상(오른쪽). 현지 가이드가 말하기를, 본래 한국의 유물을 독립적으로 전시하는 공간이 없었다고 한다. 즉,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뜻이다.
북아프리카의 모자이크화, 비잔티움 양식의 모자이크와 닮았는데 그것과는 무관하다. 신기했다.
이집트관에 있는 일명 '생강 할아버지' 미라(Ginger mummy). 자연 미라이며, 생강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은 시신의 머리카락이 붉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집트관에 있는 여러 형태의 유물(왼쪽)과 파피루스 문서(오른쪽). 왼쪽 사진은 이동 과정에서 급하게 찍은 거라 장식품들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이집트관에 있는 각종 미라 중 일부. 100% 진품이라고 한다. (그만큼 영국이 이집트를 수탈했다는 뜻이다.)
이집트관에 있는 상형문자가 표기된 비석(왼쪽)과 가죽을 시찰하는 장면이 담긴 묘지 장식 그림(오른쪽, 위의 책, p.38)
람세스 2세(Ramesses II, B.C 1303~B.C 1213)의 흉상(왼쪽)과 그의 실제 유골을 토대로 재현한 얼굴 사진이 담긴 여권(오른쪽). 프로파간다의 흔적이다.
그 유명한 로제타석. 사진을 찍으려는 인파가 너무 많아 측면에서 겨우 찍었다(로제타석에 대한 정보는 위의 책, p.48를 참고할 것).
아시리아관 입구, 내부는 구경하지 못했다. 아시리아(Assyria)는 고대 서아시아 세계를 최초로 통일한 국가이며, 입구의 석상은 라마수(Lamassu)로 전설상의 동물이다.
비너스상(왼쪽)과 네레이드의 기념물(오른쪽). 네레이드의 기념물은 크산토스(오늘날 터키의 키닉)에 있었던 지배자의 무덤이다(위의 책, p.86).
파르테논 신전 상단에 있었던 부조들. 본래는 박물관 천장 위에 걸어놨다고 한다.
그리스의 신들을 묘사한 석상들. 왼쪽의 석상은 디오니소스, 오른쪽의 머리 없는 3개의 석상은 헤스티아, 디오네, 아프로디테로 추정된다(위의 책, pp.70, 74).

흥미롭게 관람했기를 바란다.


관람 시간은 한 시간 반 정도 걸렸다.

짧지 않은 관람 시간이었지만, 그럼에도 보지 못한 게 많았다.

꼭 다시 와서 더 많은 유물을 제대로 관람해보고 싶다.


관람을 마친 뒤, 중앙 광장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나가려 했는데 갑자기 비상벨이 울렸다.

그러자 등 떠밀리듯이 박물관을 나가야 했다.

다행히 볼 건 다 봤지만, 이제 막 구경하려는 관람객들은 정말 당황했을 것이다.

비상벨이 울린 원인은 화재경보기가 오작동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박물관 규모가 워낙 크다보니, 화재가 발생하면 정말 큰일이 난다.

그래서 화재경보기가 비록 오작동한 것이라 하더라도,

일단 관람객을 모두 퇴장시켜서 유물이 안전한지 확인하는 것 같다.


대영박물관을 관람할 때, 이러한 변수도 고려해야 한다.

기껏 보러 왔다가 허탕칠 수도 있다.

이것이 대영박물관 관람에 너무 큰 기대를 가질 필요가 없는 네 번째 이유이다.

우리나라의 국립중앙박물관이 최고다.

대영박물관 내부의 중앙 광장(Great court)
대영박물관 표지석(왼쪽)과 정문(오른쪽)

이렇게 영국에서의 여행 일정이 모두 끝났다.

점심은 김밥으로 떼우고, 프랑스로 넘어갈 채비를 했다.

그 과정은 다음 글에서 얘기하겠다.


대영박물관을 소개한 이 글을 쓸 때,

'역사 전공자로서 정성껏 설명하고픈' 욕심이 마구 샘솟았다.

그 욕심을 최대한 줄였는데도 많은 이야기가 뿜어져 나왔다.

앞에서도 말했던 세계사의 끝없는 새로움, 흥미가 이런 것이구나를

간접적으로 느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 글을 통해 딱딱하게 여겼던 역사를

생동감 있고 이야기가 풍부하게 넘쳐흐르는 흥미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면, 필자는 더없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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