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나는 올해 마흔이다.
직장에서 선임 역할을 하고 가정에서는 아이들을 키우며 부모 역할을 하고 있다. 40살이라는 숫자는 삶을 살아온 연륜과 멋이 있을 거라 기대하겠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어릴 적 생각했던 중후한 멋을 지녔을 듯한 40살 아저씨와 전혀 다른, 나는 철없는 40살 아저씨다. 어찌나 철이 없는지 약간의 오해에도 분노를 표출하고 먹을 걸로 8살짜리 딸과 자주 싸운다. 20대 멋모르던 나는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능력이 발전되고 인격적으로 훌륭해질 거라는 기대를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겸손은 덜해지고 고집만 늘어나는 철없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직장생활을 시작한 후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얻을 기회는 점점 사라지고 같은 일을 반복적으로 하는 삶을 살고 있다. 내 삶은 발전하지 않고 똑같은 하루를 계속 반복한다. 그런 색다름이 없고 되풀이되는 삶은 나에게 고집스럽고 옹졸한 마음을 선물했다.
나는 본래 성격이 급하고 화가 많다. 반대되는 의견에는 나를 부정하는 거라 생각해 불편함을 감추지 못했다. 일처리가 빠르지 않으면 조바심이 났고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화를 가라 앉히려 노력했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그런 나의 화는 아래로 흘렀다. 마음속에 품은 화는 중력의 법칙에 따라 아래로 흐르더니 어느새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무의식적으로 짜증 내는 나를 발견했다. 힘들었던 하루의 푸념을 아이에게 하는 것을 알고 이대로 살면 큰일 날 거라는 위기감을 느꼈다.
이런 위기의 순간에서 나를 구해준 것이 바로 글쓰기다. 글쓰기를 하며 나는 많을 것을 얻었다.
객관화/명확화
머릿속으로 생각을 할 때는 정리가 잘되지 않는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문제는 점점 더 커 보였고 해결책도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문제를 종이에 적기 시작하니 좀 더 객관화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적다 보니 생각보다 문제가 심각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고, 해결책을 찾는 경험도 했다.
마음의 안정
힘든 일과 답답한 일을 글로 적다 보면 해결책을 찾기에 앞서 심적인 안정을 얻을 수 있다. 내 삶에 제약을 거는 것들을 마냥 생각만 할 때는 산더미처럼 커 보이지만 막상 적어보면 별것 아닌 경우가 많다. 객관적으로 적는 행위 자체가 사건을 단순화시키고 심적인 안정감을 갖게 도와주었다.
내 삶의 기록
기록하지 않은 삶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글로 기록된 삶은 나만의 역사가 된다. 매일 글쓰기를 하는 것은 내 삶의 콘텐츠를 축적하는 것이다. 비록 내가 쓴 글이 수준 낮은 글일지라도 그 글은 내 삶의 여정으로써 중요한 자료가 되어 남는다.
매일 글쓰기를 하면 나를 객관화하여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축적도 일어난다. 그런 객관화된 내 모습과 경험의 축적을 통해 자연스럽게 나를 성장시킬 수 있다. 혹자는 자기 계발의 최고 단계가 글쓰기라는 말은 한다.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했을 때 예전 내가 바랐던 제대로 된 어른, 중후한 멋을 지닌 중년의 나로 변할 거라 생각한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하는 거다. 그럼 어디서 시작하지? 간단하다. 지금도 좋고 나중에도 좋은 일을 찾아야 한다. 이 말은 또 이렇게 변주될 수 있다. 나에게도 좋고 너에게도 좋은 일. 청년기에도 좋고 중년에도 좋고, 노년에도 좋은 일. 그런 일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중략) 나에게는 이것이 바로 글쓰기다. 생명의 자율성과 능동성에 가장 적합한 행위다. 나한테도 좋지만 세상 모두에게 권하고 싶다. 누구든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싶어 한다. 나아가 지혜를 원하지 않는 이는 없다. 세상의 이치를 터득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이는 더더욱 없다. 그럼 그것을 가장 잘 훈련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 글쓰기다. 글쓰기는 노동이면서 활동이고 놀이이면서 사색이다.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는 담대함이 요구되지만 동시에 세상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만, 타자와 깊이 뒤섞여야만 가능하다. 원초적 본능이면서 동시에 고도의 지성을 요구한다. 이보다 더 좋은 활동이 또 있을까?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_고미숙>
#글쓰기 #마흔의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