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영화 (2)
어린 시절, 전쟁은 내게 한 편의 화려한 영웅담 같았다. 람보와 코만도 같은 영화 속에서 근육질의 주인공은 수십 명의 적을 단숨에 쓰러뜨렸고, 전투는 흥미진진한 게임처럼 펼쳐졌다. 영웅은 언제나 정의로웠고, 승리는 당연히 그들의 몫이었다. 월남전을 배경으로 한 이런 영화들은 전쟁을 단순히 스릴 넘치는 모험처럼 그려냈고, 수많은 전쟁 영웅을 남겼다.
그런 내게 처음으로 전쟁의 잔혹한 현실을 깨닫게 해 준 영화가, 바로 올리버 스톤 감독의 플래툰이었다. 그곳에는 내가 익히 알던 영웅도, 명확한 정의도 없었고, 대신 혼란과 공포, 그리고 서로를 믿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젊은 병사들의 처절한 삶이 있었다. 영화는 베트남전의 참혹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전쟁이 결코 멋지거나 낭만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1986년에 개봉한 플래툰은 1960년대 말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전쟁의 참혹함과 그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내적 갈등을 심도 있게 탐구한 영화다. 주인공 크리스 테일러(찰리 쉰 분)는 대학을 중퇴하고 자원입대하여 전쟁터로 뛰어든 인물로, 전쟁 속에서 인간성과 도덕성이 시험받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영화의 중심에는 전쟁이 인간에게 미치는 상반된 영향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두 인물, 엘리아스 상사와 반즈 상사가 자리 잡고 있으며, 이 두 인물의 대립은 크리스의 내면적 갈등을 반영하고 있다.
엘리아스 상사는 전쟁의 비인간적인 현실 속에서도 인간성과 도덕적 신념을 지키려는 인물로, 병사들에게 연민을 보이고 민간인을 보호하려 하며, 전쟁의 어둠 속에서 크리스에게 이상주의적 가치를 심어주기도 한다. 그의 따뜻함과 정의감은 전쟁 통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반즈 상사는 폭력의 순환 속에서 인간성을 완전히 상실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냉혹하고 무자비한 리더로, 생존과 승리를 위해 도덕적 경계를 넘어선 결정을 내리며, 전쟁의 논리에 철저히 물든 존재로 묘사된다. 그의 흉터로 뒤덮인 얼굴과 강렬한 카리스마는 전쟁의 본질과 인간성의 취약성을 성찰하게 할 정도로 섬뜩하다.
두 인물의 대립은 엘리아스의 죽음으로 극에 이르게 된다. 정글에서의 전투 중, 엘리아스는 반즈의 전쟁 범죄 행위를 상부에 보고하려 결심하자, 이를 눈치챈 반즈가 혼란스러운 전투 상황에서 엘리아스를 총으로 쏘고, 그가 죽었다고 부대원들에게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퇴각하는 미군의 헬리콥터 아래로 치명상을 입은 채 적군에게 쫓기는 엘리아스가 나타난다. 적군의 총알이 빗발치는 정글 속에서, 피투성이 몸으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하늘로 올리며 전사하는 장면의 처절함은 느린 화면과 함께 한스 짐머의 "Adagio for Strings" 음악으로 극대화된다. 엘리아스의 마지막 장면은 전쟁의 비인간성과 인간성의 붕괴를 강렬하게 보여주는 순간으로, 이 작품의 철학적 깊이를 더해주는 장면으로 유명하다.
올리버 스톤 감독은 엘리아스를 통해 전쟁의 비인간성과 인간 내면의 갈등을 조명하며, 전쟁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붕괴시키는 비극이라고 이야기한다.
플래툰의 마지막 장면에서 잔잔하지만 소름 돋는 크리스 테일러(Charlie Sheen)의 독백이 이 영화를 나의 인생 영화로 남게 해 주었다. 크리스는 자신이 겪은 경험과 전쟁 속에서 살아남은 것에 대한 깊은 반성과 혼란을 토로하고, 전쟁에서 죽어간 친구들과 동료들, 특히 엘리아스 상사의 죽음에 대해 회상하며, 전쟁의 참혹함과 그로 인한 인간성의 상실에 대한 고뇌를 표현한다.
"I think now, looking back, we did not fight the enemy; we fought ourselves. And the enemy was in us. The war is over for me now, but it will always be there — the rest of my days, as I'm sure Elias will be, fighting with Barnes for what Rhah called 'possession of my soul.' There are times since... I've felt like the child born of those two fathers. But be that as it may, those of us who did make it have an obligation to build again, to teach to others what we know, and to try with what's left of our lives to find a goodness and meaning to this life."
"지금 돌아보면, 우리는 적과 싸운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싸웠던 것 같다. 그리고 진짜 적은 우리 안에 있었다. 전쟁은 이제 끝났지만, 나에겐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엘리아스와 반즈가 내 영혼의 주인이 되기 위해 싸웠던 것처럼. 가끔은, 내가 그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처럼 느껴진다. 그렇지만 살아남은 우리에게는 다시 세워야 할 책임이 있다. 우리가 알게 된 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고, 남은 삶 속에서 선과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할 책임 말이다."
https://youtu.be/p25bS4VXYq8?si=BfkAwM4ylVza8S_5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성을 버리거나, 인간성을 지키려다 목숨을 잃는 이들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수많은 민간인의 희생, 무력 앞에 침묵하는 사회, 그리고 점점 무뎌져가는 세계의 양심까지,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현실 속에도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
전쟁은 때로 피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플래툰의 한 대사는 명확하게 답변한다.
“당신이 적과 싸우기 위해 총을 들었지만, 결국 가장 치명적인 상처는 당신 자신에게 남는다”라고....
현대사회가 진정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은, 힘을 통한 지배가 아니라 공존을 위한 용기가 아닐까 싶다.
인간성을 지키는 가장 큰 용기는, 총을 드는 것이 아니라 총을 내려놓는 선택일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