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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vy Jack House 이야기

시간을 품은 집의 재탄생

by 캐나다 마징가

웨스트 밴쿠버의 해안 산책로를 걷다 보면, 초입의 건물들 사이로 유독 눈에 띄는 집 한 채가 있다. 낡은 지붕과 빛바랜 외벽, 오래된 나무 창틀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 집은 Navvy Jack House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밴쿠버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주택 중 하나인 이곳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특별한 장소이다.

1870년대 초, 웨일스에서 건너온 이민자 존 토머스(John Thomas)가 직접 지었다고 한다. 그는 영국에서 철도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노동자였고, 당시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Navvy’라고 불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Navvy Jack’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거친 현장에서 고된 삶을 이어가던 그는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머나먼 캐나다 서부 해안까지 오게 되었고, 마침내 지금의 웨스트 밴쿠버 해안가, 바다 가까운 아름다운 땅 위에 가족을 위한 집을 짓게 된다. 오늘날 이 집은 단순한 주택의 의미를 넘어, 당시 이주민들의 삶과 희망이 고스란히 담긴 소중한 기록이 되었다.


이 집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또 하나의 이유는, 집주인이었던 Navvy Jack이 스쿼미시(Sḵwx̱wú7mesh) 원주민 여성인 Sla-wiya와 결혼해 이곳에서 함께 살았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유럽계 이주 남성과 원주민 여성 사이의 결혼은 매우 드물었고, 사회적으로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가정을 이루었고, 네 명의 자녀를 낳아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혼혈 가정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Navvy Jack House는 단순한 주거 공간을 넘어, 서로 다른 두 문화가 만난 장소이자, 차별과 단절의 시대 속에서도 공존과 사랑이 가능했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역사적 증거라 할 수 있다.

그 후 이 집은 지역 개발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 존 로슨(John Lawson)의 소유가 되었다. 그는 이곳을 단순한 주거 공간으로만 쓰지 않고, 지역 최초의 우체국이자 시의회 회의 장소 등으로 활용하며 마을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하게 했다. 이후 이 집은 여러 세대를 거치며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고, 마지막으로 윌리엄스(Williams) 가족이 45년 동안 머물다 2017년에 이사를 나가면서, 웨스트 밴쿠버 시가 이 집을 인수하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집은 점점 낡아갔고, 결국 2020년 무렵 시의회는 안전 문제를 이유로 철거를 검토하게 된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지역 주민들과 역사 보존 단체들은 “이 집은 우리 동네의 영혼 같은 존재”라며 온라인 청원과 공청회, 기금 모금 등을 통해 보존을 촉구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진심 어린 노력은 결국 시의 마음을 움직였고, 시는 백만 달러의 매칭 펀드를 약속하며 복원 계획을 공식적으로 승인하게 된다.


현재는 민간 개발사와 협력해 이 집을 다시 살리는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단순히 외형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바닷가에 위치한 이 집을 해수면 상승에 대비할 수 있도록 기초부터 튼튼히 다지는 작업이 한창이다. 완공 후에는 이곳에 작은 커피숍과 전시 공간이 들어설 예정이며, 원주민과 초기 정착민들의 이야기를 담은 예술 설치물도 함께 꾸며질 계획이다. Navvy Jack House는 이제 과거의 기억을 담은 공간에서, 미래 세대와 이야기를 나누는 열린 장소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https://www.navvyjack.com)

우리는 흔히 도시가 발전하면 더 크고, 더 새롭고, 더 효율적인 건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높은 빌딩과 반듯한 도로, 깔끔하게 정비된 시설들이 곧 ‘발전’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오래된 골목의 정겨운 풍경, 세월이 깃든 건축물, 이웃 간에 오가던 따뜻한 정 같은 것들은 더 이상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지 않는다. 하지만 더 편리해진 삶의 그늘아래, 우리는 대체할 수 없는 가치를 놓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Navvy Jack House는 단지 오래된 건물이 아니라 이곳에는 사람들의 만남과 사랑, 갈등과 화해, 그리고 시간의 결이 스며든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장소이다. 이 오래된 집을 지키려는 주민들과 시의 노력이야말로, 단순한 복원을 넘어 ‘기억을 보존하는 도시’를 만들겠다는 아름다운 노력일 것이다.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가치,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바로 이 집을 살리는 진짜 이유가 아닐까?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이 집 앞을 지나가다, 창문 너머로 오래전 이 땅을 살아간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면—그 순간 이 집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역할을 해낸 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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