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23일
예술하는 사람들은 보통 가난하다. 나는 4호선 혜화역, 대학로 근처에 있는 대학에 다녔는데 그 근방에는 소극장이 많다. 소위 밑바닥에서부터 연기를 배우겠다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대형 배급사를 등에 업고 개봉하는 영화 속 배우가 아닌 이상 우리나라에서 연기로 배불리 먹고살기는 힘들다. 그래서 혜화역 근처에서 왕왕 마주치는 젊거나 혹은 늙은 배우들은 가난했다. 값나가는 음식을 파는 식당에서는 볼 수 없었고 싸구려 선술집이나 길모퉁이 담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곳에서나 마주칠 수 있었다. 나는 가끔 아니 자주 그들을 염려했다. 그들을 만날 때면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배우 송강호가 했던 대사가 꼭 떠올랐다. ‘밥은 먹고 다니냐.’ 수업이 일찍 끝난 어느 초여름 날, 나는 혼자서 소극장엘 갔다. 극의 제목과 배우들 이름이 이제는 까마득히 기억나지 않지만 난 그들의 눈을 아직도 기억한다. 무대를 비추는 조명보다 밝게 빛나던 그들의 눈을 기억한다.
예술하는 사람들은 보통 기죽지 않고 산다. 언젠가 또 수업이 일찍 끝난 어느 날, 영화 ‘거룩한 계보’에 출현한 조연 배우 한 분을 마로니에 공원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어떤 용기에서였는지 나는 그와 소주를 한 잔 마시게 됐고 그의 집에 초대받았다. 그의 집은 혜화동 비탈진 언덕배기에 있었다. 얼큰하게 취한 그는 자신의 연기 철학 그리고 예술관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다.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말은 울림이 컸다. ‘기죽지 마세요. 아직 끝까지 간 것이 아니니까. 기죽지 마세요. 지금 당신을 멸시하고 천대하는 사람들은 곧 큰코다칠 거예요. 그러니까 기죽지 마세요.’ 그는 자신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기죽어 보이지 않았다. 그 배우가 드물게라도 티브이나 영화에 나오면 반갑다. 기죽지 않고 아직 잘 연기하고 있어서 반갑다. 배우들의 소신이 그들을 기죽지 않게 하는 것 같다. 자주 기죽어 사는 내게 그 배우는 은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