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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샬롯H Aug 19. 2022

심인성 어지럼증



한동안은 사람을 마주해야 하는 상황이 상상만 해도 너무 공포스러워서 밖에 나가기가 힘들었다. 생필품은 인터넷으로 주문하여 비대면으로 받거나 편의점에서 사곤 했다. 병원에 가야 하는 데도 미루기 일쑤였고, 늦은 저녁 시간에나 나가 사람을 만나지 않을 수 있는 무인 계산대를 구비한 매장에나 드나들었다. 마음과 머리에선 끊임없는 소용돌이가 치고 있는데도 20대 내내 나를 괴롭힌 우울증으로 인해 우습지만 업무 상황에서는 거의 '일반인처럼 연기'하는 것이 가능했다.


걷기가 곤란할 정도로 버티다 간, 동네에서 나름 유명하다는 정신건강의학과에서는 초진 시에 으레 해야 하는 문진표를 작성했다. 나는 담당 의사에게 조금 우울한 것도 같다고 말했지만, 문진표를 보더니만 그런 것은 아니라고 했다. 우울증이라고 보기에는 말하는 표정이나 태도가 너무 멀쩡하다고.


아무튼 의사는 심인성으로 인해 어지러운 증상이 생길 수는 있다고 말하면서도 우울증이나 불안 장애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았다. 정신과 처방약이 멀미약과 우울증 약이었던 것을 보면 의사도 내 어지럼증에 대한 정확한 진단명 내리지 않은 것 같다.


그때 내가 20대에 이미 중증 우울증을 앓았음을 강하게 어필했다면 진료실 분위기가  심각해졌을까? 그때는 그조차도 귀찮았는지 나는  병력에 대해 자세히 말을 하지 않았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정신과 의사에 대한 믿음이 없는 데다 이번에도  증상을 가볍게 보는 이번 의사의 태도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당시는 추운 겨울이었고, 이 병원은 오전 일찍 가지 않으면 도저히 진료를 받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이 많아서 나는 오전에 병원을 갈 때는 마을버스를 타고, 걸어서 돌아오기를 수 주간 반복했다. 나아졌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치료를 받는 중이라는 위안감을 스스로에게 줄 순 있었다.


프랑스에 3개월 임시로 머무르려고 출국을 하기로 했을 땐 투약이 걱정이라 담당 의사와 면담 후 대략 한 달 치 처방약을 미리 받아왔다. 내 입장에선 딱히 어지럼증이 좋아진 것도 아닌데 의사가 한사코 '복용량을 줄여야 한다'라며 약을 반으로 절반이나 그 이상으로 줄이고 있던 차라 한 달 치라곤 하지만 캐리어에 넣을 약이 많진 않았다.



프랑스에 도착해서도 당장 심했던 어지러움이 갑자기 멈추진 않았다. 하지만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약을 거의 섭취하지 않았는데도 조금씩 증세가 나아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서 조금 더 상태가 나아지자 내 머리에서 계속 느껴지던 감각이 사실 굉장한 긴장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관자놀이 주변으로 뻣뻣하게 당겨 놓은 듯한 감각이 점차 완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같이 지낸 지 몇 주가 지났을까? 한 번은 또마와 둘이서 욕실에 둘 온풍기를 사러 슈퍼마켓에 갔다가 언쟁이 붙었다. 내가 뭐든 프랑스산은 폄하하고 안 좋게 말한다는 것이다. 그가 그 정도로 애국자인 줄은 몰랐다. 아무튼 그 순간 또마가 자리를 휙 하고 떠나버렸고, 그 순간 세상이 핑그르르 돌며 관자놀이 주변이 '지잉'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금방 화해했지만 그 경험이 꽤 기억에 남아, 나는 남은 체류 기간 동안 내 어지러움이 심인성이라는 가정 하에 어떤 상황에서 증상을 심하게 느끼는지를 관찰했다. 결론적으론 크게 두 가지 상황이었는데 첫 번째는 사람이 많은 경우, 두 번째는 사람이 적은 상황이라도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였다.


비자 발급 위해 프랑스에서 다시 한국에 돌아갈 때 즈음에는 증상이 많이 완화되었지만 귀국 후 재발이 될까 많이 두렵긴 했다. 3개월 만에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나와야 하는 상황임에도 최대한 스스로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그 덕이었는지 병원에 돌아가야 할 정도의 증상으로 악화되지 않았다.


지금도 가끔 사람이 많거나, 스트레스 상황 속에 놓이면 어지럼증을 겪는다. 하지만 이제는 나름대로 조심해야 하는 상황을 피하거나 나름의 대처법이 생겼다. 증상이 시작된다 싶으면 집으로 돌아오는 것도 대처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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